“그림값 내손에 달렸지요”… ‘경매사 24시’를 통해 본 미술품 경매의 모든 것
입력 2012-03-18 22:36
“다음은 김환기의 1958년 작품 ‘창공을 나는 새’입니다. 6억8000만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호가 단위는 1000만원입니다.”
“6억8000… 6억9000… 7억 없습니까?”
“8억… 9억… 9억2000… 9억3000… 9억4000 없습니까?”
“네, 저분이 9억4000에 들었군요. 그럼 9억5000으로 갑니다. 없습니까? 아무도 없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습니다. 9억5000 없습니까? 네, 그럼 9억4000만원에 낙찰입니다. 땅!”
지난해 6월 8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K옥션 경매에서 김환기의 유화 ‘창공을 나는 새’가 시작가보다 2억6000만원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시작부터 낙찰까지 걸린 시간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기대 이상의 고가에 낙찰된 것은 응찰자들의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지만 분위기를 띄운 경매사(競賣士)의 역할도 컸다.
경매사는 ‘경매 마술사’로 불린다. 특정 작품의 가격을 올리는 역할뿐만 아니라 응찰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계속 따라오게 유도하기 때문이다. 국내 10여개의 경매회사에서 활동하는 경매사는 20여명이다. 경매사 자격증 제도나 공인된 교육 프로그램이 없기 때문에 경매회사 직원 가운데 자질이 있는 사람을 2∼3명 활용한다. 경매사가 갖춰야 할 자질은 분위기를 이끄는 리더십, 정확한 발음의 목소리, 순간적인 판단력 등이다.
국내 메이저 경매회사 3곳이 이번 주 나란히 경매를 연다. 서울옥션(대표 이학준)은 20일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스페이스에서, K옥션(대표 조정열)은 21일 강남구 신사동 경매장에서, 고미술 중심의 마이아트옥션(대표 공상구)은 22일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각각 고미술품 및 근현대 회화 등을 경매에 부친다. 각각의 대표 경매사를 통해 경매의 모든 것을 알아본다.
서울옥션 김현희
1998년 국내 미술품 경매회사로는 처음 설립된 서울옥션의 김현희(31·여) 경매사는 2005년부터 경매를 진행했다. 한국 경매사 1호로 잘 알려진 박혜경 에이트 인스티튜트 대표와 함께 진행하다 박 대표가 서울옥션에서 독립한 뒤 최근 몇 년간은 정기 경매와 특별 경매, 홍콩지사 경매 등을 거의 혼자 맡아왔다.
경희대 역사학과를 나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김 경매사는 8년간 40여 차례의 경매 경험과 전문가적인 노하우를 살려 노련하고 편안하게 진행하는 것이 강점이다. 경매에 앞서 특정 소장자로부터 좋은 작품을 이끌어내고 도록을 만드는 일까지 맡는 등 1인3역을 한다. 그는 “적은 돈이 아니고 빨리 진행되기 때문에 정확하고 신속한 진행이 관건”이라며 “특별한 비법은 없고 신뢰를 바탕으로 편하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고객들의 취향이나 관심 사항을 웬만큼 꿰뚫고 있어 경매를 진행할 때 응찰자들과 교감 및 소통이 쉬운 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또 “최근 홍콩에서 경매를 진행하면서 한국 작품의 우수성을 외국인에게 알리고 좋은 가격으로 낙찰됐을 때가 가장 보람 있었다”며 “요즘 미술시장 자체가 기대에 못 미치기 때문에 더 이상 위축되지 않도록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 과제”라고 설명했다.
124점이 출품되는 서울옥션의 이번 경매에서는 박수근의 ‘노상의 여인들’(추정가 5억∼8억원), 김환기의 ‘무제’(4억∼5억원), 이우환의 ‘바람과 함께’(2억5000만∼3억5000만원) 등이 나오고 예금보험공사가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압류한 91점의 미술품 중 4점이 출품된다. 추정가 총액은 65억원가량.
K옥션 손이천
2005년 설립된 K옥션의 손이천(36·여) 경매사는 김순응 전 대표의 바통을 이어받아 2010년부터 경매를 진행했다. 1년에 4차례 열리는 정기 경매와 특별 경매까지 그동안 10여 차례 경매사로 나섰다.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를 거쳐 홍익대 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한 손 경매사는 발음이 분명하고 고객들의 심리 상황과 분위기에 맞춰 리드하는 솜씨가 강점이다.
그는 “경매를 진행하다 보면 고객들의 표정이나 동작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따라오다 도중에 포기할 사람, 끝까지 계속 밀고 나갈 사람을 파악하게 된다”며 “이런 고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야 하고 재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응찰자 중에는 경매장에 직접 나와 패널을 드는 경우도 있고 서면이나 전화로 입찰하는 경우도 있다. 서면은 희망 가격을 미리 제시하는 방식이고, 전화는 경매회사 내 VIP룸이나 외부에서 인터넷 중계 화면을 보면서 응찰하는 방식이다. 전화 응찰의 경우 경매사와 전화 상담 직원들 사이에 팀워크가 좋아야 한다.
K옥션의 홍보팀장도 맡고 있는 손 경매사는 “사전에 작품 정보를 파악하고 여러 번의 리허설을 거치지만 가격이나 작품명을 순간적으로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며 “그동안 경매팀 직원들의 도움으로 큰 실수 없이 좋은 결과를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환기의 ‘천공을 나는 새’ 낙찰 당시 경매를 진행한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그는 “항상 연구하는 자세로 고객들에게 신뢰를 주는 경매사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K옥션의 이번 경매에는 일본 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1000호 크기 대작 ‘인피니티 스타즈(Infinity Stars·12억∼15억원)’, 중국 작가 쩡판즈의 ‘초상화’(10억∼15억원), 프랑스 인상파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장미 꽃다발’(5억∼5억5000만원) 등 193점이 나온다. 김정숙 윤영자 최종태 최만린 등 한국 조각사를 수놓은 작가들의 작품 36점이 특별섹션 형식으로 출품된다. 추정가 총액은 100억원대.
손 경매사는 “해외 고객을 겨냥해 외국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그동안 쉽게 다룰 수 없었던 조각 작품의 대중화를 위한 것이 이번 경매의 초점”이라고 말했다.
마이아트옥션 김정민
지난해 초 설립된 마이아트옥션의 김정민(28·남) 경매사는 국내 경매사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로 지금까지 네 번 경매를 진행했다. 상명대 영화과를 나와 연극배우로도 활동한 적이 있는 그는 고객들을 사로잡는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가 강점이다. 그는 “고서화나 도자기 등 골동품 경매에 참여하는 고객들은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라며 “품목별로 관심을 가진 고객들에게 친근한 표정으로 손동작을 하거나 시선을 주면서 응찰을 이끌어내는 요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미술품의 경우 사는 사람만 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김 경매사는 고미술품의 대중화를 위해 작품의 유통 경로와 소장자 등에 얽힌 뒷이야기 등을 들려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지난해 6월 조선왕조 성종대왕비 공혜왕후의 어보가 시작가 2억5000만원에 출품돼 1분30초 만에 4억7000만원으로 낙찰된 적이 있어요. 국내의 한 소장자가 1987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를 통해 들여온 것으로 우리 문화유산 환수라는 점을 강조했지요.”
마이아트옥션의 이번 경매에는 한 인간의 일생 동안 기념될 만한 10가지 순간을 그린 ‘평생도(平生圖)’가 출품된다. 구한말 영국 선교사가 가져갔다가 최근 되돌아온 작자미상의 작품으로 추정가는 2억∼3억원. 다산 정약용의 ‘남북학술설(南北學術說):이익위(李翊衛) 노형(老兄)에게’(2억∼3억원) 등 고서화와 도자, 목기, 공예품 등 104점이 경매에 부쳐진다. 추정가 총액은 35억원 정도.
김 경매사는 “소중한 유물들의 가치를 많이 알리고 안목이 있는 고객들이 좋은 가격에 낙찰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