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 선율에 실려오는 사랑의 의미… ‘모스크바의 연인들’

입력 2012-03-16 18:41


공영희 소설집 ‘모스크바의 연인들’

공영희(60·사진)라는 소설가가 있었다. 전주여고 재학 중이던 1971년 경희대 주최 전국문예콩쿠르 소설 부문에 당선된 그는 단편 ‘밧줄’로 ‘시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어 ‘현대문학’ ‘월간문학’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던 중 주변의 시선을 뒤로 하고 92년 초등학생인 어린 딸 둘을 데리고 러시아 모스크바로 떠난다. 모스크바 체류 16년, 그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그는 소설가로서의 굳었던 손을 천천히 녹이면서 작품을 썼다. 모스크바 한인신문에 간간히 작품을 발표하던 그는 2007년 귀국해 지난해 단편 ‘섬에서 만난 아이’로 중국 연변소설가학회 주최 ‘두만강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는 잊혀진 작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소설가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설집 ‘모스크바의 연인들’(청어)은 그런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리며 이국적 향수를 불러온다. “꼴랴, 니콜라이 이바노프, 이제 그는 이 세상에 없다. 나는 울 수도 없다. 울음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나, 안나, 민우엄마를 지극히 사랑했던 젊은 연주자. 바이올린에 영혼을 실었던 예술가. 꼴랴, 내 사랑. 이제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것입니다. 고이 잠드소서.”(168쪽)

작중 인물 서안나가 사랑했던 러시아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죽음을 애도하는 중편 ‘뜨베르스카야의 연인들’ 마지막 장면이다. ‘뜨베르스카야’는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국립음악원 근처에 있는 거리로, 타스통신사와 마야콥스키 극장이 위치한 문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니콜라이 이바노프(약칭 꼴랴)는 차이콥스키 국립음악원에 다니는 안나의 아들 민우의 바이올린 선생이다. 아들이 첫 등교한 날, 지도교수로부터 실기 수업 교사로 소개받은 꼴랴는 유부녀 안나에게 반해 연서를 보내기 시작한다.

“당신과 민우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저의 마음은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마치 어머니를 뵙고 오는 것 같은 충만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부인은 저의 어머니처럼 제게 편안함을 안겨주셨습니다.”(21쪽)

안나에게 모성을 느끼는 꼴랴의 순애보는 작품 전반에 걸쳐 계속되지만 문제는 꼴랴에게 서서히 끌려가는 안나의 심리에 있다. “나이를 훨씬 뛰어넘은 의젓함이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다. 그는 우리의 사랑을 운명적이라고 지적하고 자신을 몰입시켰다. 나는 되돌아본다. 그가 나를 사랑한 만큼 내가 그를 사랑했는가?”(168쪽) 둘의 사랑은 항공기 추락으로 꼴랴가 사망하면서 막을 내리지만 젊은 예술가의 사랑 앞에서 갈등하는 안나의 모성이 길게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절대적인 사랑, 대체할 수 없는 사랑으로 다가오기에 오히려 충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끝내 이룰 수 없었던 사랑. 어찌 보면 작가는 이러한 사랑을 통해 사랑의 의미와 진정성에 대해 독자들에게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수록작들도 그동안 한국소설에서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문화적 감동을 안겨준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