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곽경호] 김제동은 왜 보이지 않나

입력 2012-03-15 18:22


그날 그 자리에 그는 없었다. 신문에 나온 단체사진에도 참석자 명단에도 그는 없었다. 나는 그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했다. 뜬 듯 만 듯한 작은 눈을 안경너머로 반짝이며 그가 그곳에 있기를 바랐다. 윤복희가 ‘여러분’을 눈물로 열창할 때, 강원래가 울면서 호소문을 읽어 내려갈 때, 참새처럼 작은 이성미가 날갯죽지를 들썩이며 눈물을 삼키고 있을 때, 가끔씩 개그 소재가 되곤 하던 ‘분노연기’의 한 장면처럼 차인표가 굳은 입술로 서있던 그 자리에 그가 있었으면 했다.

결혼정보업체를 꾸려 나가느라 나날이 분주한 가수 노사연·이무송 부부, ‘나는 가수다’의 비주얼 스타 김범수, 요즘 들어서야 겨우 잘 나가는 박완규는 보이는데,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런 자리에는 그가 있어야 했다. 적어도 나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소통의 아이콘’ ‘SNS의 달인’으로 불리며 이른바 소셜테이너의 대표주자로 여기저기에 나타나서 번뜩하는 재치를 보여주던 그였으니까 당연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 어떤 이슈보다 중한 목숨을 살리자는 자리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4일 저녁 7시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 100주년기념관 대강당. 탈북자 강제 북송 중단을 호소하기 위해 열린 콘서트 ‘크라이 위드 어스’ 공연장. “비판이나 대안 제시는 잘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사람들 관심을 모으는 일은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이라며 차인표 등이 시작했던 일이다

그래서 불과 12일 만에 모인 연예인 49명은 모두 바쁜 일정을 쪼개 무료로 출연한 것은 물론 진행비 수천만 원까지 자비(自費)로 떠안았던 특별한 행사였다. 그날 탈북자 1000여명이 위로받고 그들과 함께 울 수 있었던 그 자리에 그는 없었다.

‘크라이 위드 어스’는 말 그대로 함께 울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곳에 모인 그들 연예인들은 대부분의 소셜테이너들에서 보듯 뜨거운 감자가 있거나, 누군가 판을 벌여 놓은 곳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단 한 명의 여자 국회의원이 단식하고 있을 뿐 모두가 외면하는 탈북자 인권문제에 스스로 판을 만들어 뛰어들었다.

그들은 격렬한 구호나 단호한 몸짓을 하지 않았다. 한 명씩 무대에 올라 “탈북자와 함께 울겠다”고 낮은 목소리로 서약한 게 전부였다. 그들은 그저 “생명과 인권을 위해 나선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 그 자리에 그가 함께 있었다면, 그가 지금까지 여기저기 나타나서 주장했던 여러 가지 얘기들을 지금 와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쯤으로 여기지 않을 텐데 말이다.

누군가의 어느 한쪽을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하나뿐인 목숨을 위해 모두가 함께 울자고 모였던 그 자리에 우리의 김제동은 왜 보이지 않나. 그 많은 김제동이들 또한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곽경호 방송작가·월간 SEE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