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슬프다! 원죄때문에… 정연희 작가 ‘빌려온 시간’ 출간
입력 2012-03-15 17:37
정연희(76) 작가가 새로운 책을 들고 독자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지난 5년간 집필한 중·단편 7편을 묶어 최근 ‘빌려온 시간’(시선사 간)을 발간했다.
작품이 배열된 차례에 따라 소개를 해보면 ‘빌려온 시간’은 청년들의 뉴욕 정착기를 다루고 있고, ‘날은 날에게 말하고’는 방송 드라마의 엑스트라로 밤일을 하며 품삯을 받는 노역자의 하루를 좇고 있다. ‘한나절’은 시골의 한갓진 도요지에서 옛 스승을 만난 이야기이고, ‘심연’은 쓸쓸한 홑몸의 여인이 음악실을 찾아 외로움으로 마음 속 깊은 정서에 젖어가는 모습을 그린다. 또 ‘섣달 열이레’는 시골의 후덕하지만 박복한 노인들의 아름다운 슬픔을 담아낸다. ‘새들은 야단맞고’는 은퇴후 시골에서 살아가던 작가 부부의 푸근한 정경을 담았고,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는 구약에서 아버지를 반역해 결국 죽음을 맞은 압살롬을 애타게 부르는 다윗의 절규를 옮기고 있다.
자리도, 사람도, 일어난 일도 갖가지이지만 한결같은 공통점들이 있다. 그 하나는 종교적 심성이다. 그 종교는 기독교인데, 작가는 자신이 개신교도이지만 소설의 종교적 심성은 구약에 많이 의존하는 가톨릭적 사유가 만연하다. 얼핏 불교적 정서도 나타나고 노장적 인생관도 비친다.
또 하나 공통점은 등장인물들이 거의 ‘패배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반려를 잃은 싱글이 일상의 상심에 빠져들거나 나이 때문에 물러나 있고 실의로 방황하며 혹은 번잡한 나날에서 헤매기도 하며 그들의 초라한 삶을 겸손하게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작가는 패배자의 처지를 오히려 공감의 정서로 감정이입하고 있다.
이런 종교적 사유와 삶에 대한 겸허한 시선, 그리고 내면적으로 누리는 문학적 감성에서 작가 정연희의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제 문학인생을 나누라면 예수 믿기 이전과 예수 믿은 이후로 나눌 수 있어요. 이전에는 다분히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글을 썼다면 이후에는 신앙을 바탕으로 한 본질적인 이야기들을 쓰고 있어요.”
사변적이고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랑에 대해, 아가페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해 인식의 문이 닫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난 뒤에는 생명의 본질적인 부분이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사물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작가는 이 책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키워드는 ‘죄와 죽음’이라고 말했다.
“첫 작품부터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쓰라림이에요. 자기 탓, 죄가 불러온 건 결국 죄와 죽음인 거지요.”
그가 여기서 말하고 싶었던 바는 누구든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죄의 그림자를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할 때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얻는 것은 각자 소설을 읽는 사람의 몫이라고 했다. 결국 독자들은 인간은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슬픔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만 겪는 게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작품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되는 거지요. 갈등이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위로고 힘이고 용기가 아닐까요?”
70대 중반의 노작가는 요즘 전집을 준비하고 있다. 평생을 정리할 줄 모르며 살아오다보니 다섯 차례의 신문연재 중 책으로 엮어지지 않은 세 편의 스토리가 전혀 생각나지 않은 것이 계기였다. 장편, 단편, 수필, 기행문 등을 모을 생각이라고 했다. 그가 전집을 내려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전자책에 밀려 종이책이 죽었다고 하는데 국가경쟁력은 문화가 우선이에요. 전자책은 영혼의 울림이 없어요. 그러므로 종이책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문화의 미래는 없습니다.”
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