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 난 누구인가? 물음으로 시작된 여성운동 선각자들의 정신과 만난다
입력 2012-03-15 18:26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한정숙 엮음/한길사
여성과 남성. 그 차이와 다름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여성주의(페미니즘)에서 제기하는 질문은 여기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8세기 말 선구적 여성주의를 대표하는 영국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서부터 20세기 말 벨기에 출신 프랑스 학자 뤼스 이리가라이와 미국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 등에 이르기까지. 두 세기 동안 여성주의를 이끌어온 대표적 사상가들의 삶과 그들의 대표 저작을 통해 여성주의의 지적 패러다임을 골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19세기 여성주의가 이미 낡은 것이라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20세기로 곧장 건너뛰는 것도 독서의 한 방법일 것이다.
“서서히 한참 동안은 그것이 명확하게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나는 오늘날 미국 여자들이 살고자 하는 방식이 아주 잘못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것을 처음으로 감지한 것은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로 규정되는 나 자신의 삶을 향해 던져지는 의문부호를 통해서였다.”
1960년대 이후 미국 여성운동을 이끈 유명 지도자 베티 프리단(1921∼2006)이 저서 ‘여성성 신화’(1963년) 초판에 쓴 서문의 일부이다. 전직 기자이자 자유기고가로 활동해온 프리단은 전업주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미스 여대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을 여성잡지에 투고한 것을 계기로 수많은 주부들이 같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짐의 아내, 제니의 엄마, 기저귀 갈아주고 눈옷 입혀주는 사람, 밥 해주는 사람, 어린이 야구장에 데려다주는 운전사입니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나는 누구인지요? 세상이 마치 나 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주부들의 가려진 심정과 고통을 대표하는 이 질문을 프리단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라고 명명했다. 그것은 정체성의 문제였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즉 “나는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가정 말고 다른 무엇을 원한다”는 목소리가 여성 내면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프리단은 ‘여성성 신화’에서 “교육이나 매스미디어 등을 통해 유포되는 지배담론을 통해 여성이 자아를 포기하고 여성성 신화를 내면화했다”고 보았다.
프랑스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이리가라이는 저서 ‘하나이지 않은 이 성’(1977년)에서 간단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답을 내놓는다. “여성과 남성은 다른데 그 다름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명제가 그것이다. ‘하나이지 않은 이 성’의 서문에 해당하는 ‘거울, 다른 쪽에서’라는 글은 영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리뷰로 시작한다. 앨리스로 표상되는 여성의 여정을 회고적으로 되짚으면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 억압 체계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장인 시적 산문 ‘우리의 입술이 저절로 말할 때’이다.
“울지 마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말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가 하게 될 말은 완전한 액체인 우리의 눈물보다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둘에 불과한가? 우리는 환영들, 이미지들, 거울들의 이쪽 편에서 둘로 살아간다. 우리의 닮음은 위장 없이도 가능하다. 이미 우리의 육체 안에서 같아진다. 너를 만지고, 나를 만져라. 너는 ‘보게 될’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 여성주의 이론을 먼저 탐색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넉넉한 저작이다. 2007∼2008년 서울대 여성연구소가 개소 10주년을 맞아 기획한 집중토론회 내용이 토대가 됐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