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을 통한 우리 현대시의 도전과 성취… ‘현대시의 운명, 원치 않았던’

입력 2012-03-15 18:26


현대시의 운명, 원치 않았던/오문석/앨피

시인 임화(1908∼1953)는 무성 영화 ‘유랑’(1928)과 ‘흔적’(1929)에 주연배우로 출연한다. ‘유랑’에서 상대 여자 주인공 이름은 ‘순이’이다. ‘순이’는 임화의 시 ‘네거리의 순이’와 ‘우리 오빠와 화로’에 등장하는 오빠-누이의 구도로 변형된다. 흥미로운 것은 시의 문체가 무성 영화의 변사조 말투로 표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적 체험이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1935년, 무성영화는 종언을 고하고 유성영화시대로 접어든다. ‘변사’라는 직업군은 역사의 유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는 임화가 한때 지향했던 변사조의 배역시가 낡은 형식으로 밀리게 된 계기였다.

한국 근대시 혹은 현대시의 운명에는 이처럼 ‘원치 않았던’ 순간들이 존재한다. 영화의 등장에 대해 시인 김기림(1908∼?)은 ‘문예월간’ 1932년 1월호에 게재된 ‘청중 없는 음악회’에서 “시를 위하여 지극히 불행한 일이 있다”며 “시보다 매우 연령이 어린 소설이, 그보다는 ‘키네마’가 시의 존재를 위협하는 일이 그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변사조의 배역시가 무력해지는 것을 경험한 임화의 처지를 감안하면 김기림의 이러한 지적은 매우 적확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시단의 이런 술렁임은 시적인 것을 포기하고 영화적인 것으로 전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적인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적인 것에 접근하려는 희망적 역설의 발견이었다. 숏과 숏 사이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화의 ‘충격 몽타주’라는 형식이야말로 몽타주가 궁극적으로 ‘시적인 것’에 도달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새로운 리얼리티가 시적인 것에 잠재돼 있다는 사실을 영화가 먼저 보았던 것이고, 영화가 일깨워 준 시적인 것의 본질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현대시는 다시 한번 도약하게 된다. 이 역시 ‘원치 않았던’ 한국 현대시사의 한 장면이다.

오문석 조선대 국문과 교수는 우리 현대시사의 전환점이 된 이런 장면들을 “종교개혁의 문화적 영향은 상당 부분 종교개혁가들 활동의 예상치 못했던 혹은 심지어 ‘원치 않았던’ 결과”라는 막스 베버의 말을 인용해 설파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원치 않았던’ 결과, 이 얼마나 신비로운 말인가. 만사가 항상 뜻대로만 된다면야 인생에 무슨 신비가 있을 것인가.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예상치 못했던’ 혹은 ‘원치 않았던’ 강물이 심연을 형성하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