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12) 가이사랴의 이달리야 부대

입력 2012-03-15 17:46


수출입하면서 마가는 가이사랴항 치안 책임자 고넬료 만났을 가능성

BC 37년 하스몬 왕조의 공주 마리암네와 결혼한 헤롯은 로마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장인의 나라를 찬탈하여 유대 왕이 되었다. 헤롯은 본래 건축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BC 30 년 그는 사마리아를 재건하고 그 이름을 세바스테라고 했다. 세바스테는 그를 유대 왕으로 인정해 준 아우구스투스의 헬라식 이름이었다. 그는 또 예루살렘에 극장과 원형경기장을 건설했고, BC 20년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착공했다. 성전을 완공하는 데는 46 년이 걸렸다.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요 2:20)

예루살렘 성전을 착공하기 2년 전에 헤롯은 또 하나의 걸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스트라토 망대가 있던 해안에 건설한 인공 항구 가이사랴였다. 그 남쪽에 입지 조건이 좋은 욥바 항이 있기는 했으나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의 테러가 빈발하는 곳이어서 헤롯은 세바스테 서쪽에 접안이 자유로운 새 항구를 갖고 싶어했던 것이다. 12년에 걸쳐 완공된 이 항구에는 길이 145m, 폭 60m의 방파제가 건설되었고, 극장과 경기장 그리고 왕궁과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전 등이 들어섰으며 규모는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보다 더 컸다.

가이사랴의 지하 설계는 현대 도시의 지하 구조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도시의 지하에는 많은 저장실과 물류 창고들이 지상 못지않게 아름다운 구조로 축조되었고, 특히 그 중에도 규모가 큰 창고들은 부두까지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선박에서 내린 화물들을 직접 운반해 들이고, 또 실어낼 화물들도 그 통로를 따라 부두로 보내 선적할 수 있었다. 또 그와는 별도로 도시의 모든 지역은 경사진 지하 통로로 모두 연결되어 하수 처리를 할 수 있었다. 헤롯은 당시 사마리아 지역의 산업을 효율화하여 건설 자금을 제대로 조달했다고 한다.

“가이사랴는 좋은 건축 자재와 우수한 기술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도시였다.”(유대고대사 15-9)

헤롯은 그 아들들에게 자신의 영토를 나누어 주고 죽었으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물려받은 아켈라오가 폭정 때문에 해임되고, 로마는 AD 6년 코포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 때부터 가이사랴는 총독궁의 소재지가 되었다. 그 후에 다시 총독은 마르쿠스 암비비우스, 안니우스 루푸스, 발레리우스 그라투스 등으로 바뀌다가 AD 26년 본디오 빌라도가 제5대 총독으로 부임한 것이다. 그가 바로 산헤드린의 요청으로 예수의 십자가형을 선고한 자였고, AD 36년 사마리아 폭동을 잘못 처리한 죄로 해임되었다가 후에 자살했다고 한다. “구세주께서 십자가형에 처하던 날 총독으로 있었던 빌라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유세비우스 ‘교회사’ 2-7)

본디오 빌라도의 후임으로 온 마르켈루스 총독의 임기는 이듬해인 AD 37년 황위를 계승한 카이우스가 자기 친구인 아그립바 Ⅰ세를 유대 왕으로 임명하면서 끝났다. 가이사랴의 총독궁은 아그립바의 소유가 되었다. 그는 매부 안디바가 사용하던 디베랴의 왕궁과 가이사랴의 총독궁을 번갈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카이우스가 죽은 후에도 글라우디오 황제가 아그립바 Ⅰ세를 유대 왕으로 인정했으나 로마 군부는 이달리야 부대를 가이사랴에 파견했다. 이달리야 부대는 본래 로마에만 주둔하던 이탈리아 출신들의 엘리트 부대였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행 10:1)

이달리야 부대는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부대로 한번도 외국에 나간 적이 없고 로마에만 주둔하는 엘리트 부대였다. 로마 군부가 카이우스 황제를 제거한 후 곧 이달리야 부대를 가이사랴에 파견한 것은 카이우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아그립바 Ⅰ세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불구인데다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글라우디오 황제가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그를 총애한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수 없어서 가장 믿을만한 이달리야 부대를 파견한 것이었다. 그 이달리야 부대의 엘리트 지휘관이 바로 고넬료 백부장이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이달리야 부대의 엘리트 장교이며, 특수한 임무를 띠고 가이사랴에 파견된 지휘관이라면 그는 로마에서도 명문가의 후예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넬료, 즉 코넬리우스라는 그의 이름은 카이우스 제거에 참여했던 코넬리우스 사비누스 장군을 연상시킨다. 그는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글라우디오 황제도 그를 신임하여 군대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함께 거사를 주도했던 케레아가 처형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책임과 의리를 지켰던 것이다.

로마 명문가의 후예인 고넬료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던 것일까? 로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와 관련 있는 장소로 유대인 회당을 생각할 수 있다. 안티오쿠스 시대에 로마까지 흘러들어간 유대인들이나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그들의 회당을 중심으로 생활했을 것이고, 카이우스 황제는 그 회당에도 자신의 상을 세우라고 명했을 것이다.

이달리야 부대의 장교인 고넬료는 황제의 상을 세우라는 명령을 전하러 갔다가 항의하는 유대인들과 부딪쳤을 수 있다. 카이우스의 광기에 실망하고 있던 엘리트 장교 고넬료는 유대인들이 설명하는 그들의 종교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해서 호감을 갖게 되고, 마침내 그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다. 그분의 가르침대로 백성을 구제하며, 잘 알지는 못해도 그들의 하나님을 사모하여 기도에 힘썼을 것이다. 그러던 고넬료가 AD 41년 가이사랴에 파견된 것이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필자가 알고 싶은 것은 부친의 사업과 그 판매망의 복구에 나선 마가가 이달리야 부대의 지휘관인 고넬료를 만날 기회가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의 부친이 사업을 크게 했다면 필시 알렉산드리아를 거점으로 활동했을 것이고, 지중해 연안에서 상업과 교역의 중심이 되는 항구와 도시에 지점과 대리점을 설치했을 것이다. 필자는 당시의 지도를 펴 놓고 그런 곳들을 찾아보았다. 당시 내륙 지역의 상업 중심지는 여리고였으나 알렉산드리아와 지중해의 상선들이 주로 드나드는 외항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55km 거리에 있는 욥바였다.

마가의 부친이 사업을 했다면 욥바 항에서 화물을 선적하거나 인수했을 것이고 마가도 그 전례를 따랐을 것이다. 또 그가 주요 수출산업의 하나로 가죽의 가공과 그 제품 생산을 추진했다면 성경에는 그와 관계있는 인물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욥바의 가죽업자 시몬(행 9:43)이었다. 따라서 욥바는 화물의 출입과 가죽산업 육성에 중요한 지역이었고, 부친이 하던 사업을 이어가려던 마가는 이곳을 빼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해안에는 욥바 외에도 도라와 아볼로니아 등의 항구가 있었으나 하나 더 중요한 항구가 가이사랴 항이었다.

욥바가 예루살렘과 직결된 외항이었다면 가이사랴는 세바스테를 비롯한 사마리아지역의 화물들이 집결되는 항구였던 것이다. 마가는 이 지역에도 화물을 실어내는 지점을 운영했을 것이고, 자주 방문했을 것이다. 가이사랴는 로마의 주요 군사도시였고, 로마인 사업가와 거주민들이 많았다. 마가가 가이사랴 항구를 자주 이용했다면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이달리야 부대의 지휘관이며, 가이사랴 항구의 치안 책임자인 고넬료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루는 제 9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3∼4)

천사는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행 10:5)

그 때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서남쪽으로 내려가며 전도하고 있었다. 룻다에서는 8년 전에 중풍으로 쓰러진 애니아를 고쳐 일으켜 세웠고, 욥바에서는 병들어 죽은 여제자 다비다를 살려내는 등 큰 기사와 표적이 잇따랐다. 인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는 가죽 업자 시몬의 집에서 여러 날 묵고 있었다.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행 10:6)

그렇게 해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