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정택 (7) 심수봉과 동행한 여인 “주님이 보내서 왔어요”
입력 2012-03-14 18:09
1990년 6월의 어느 날, 초여름 비가 세차게 퍼부었다. 홀리데이 인 서울에서 야간 공연을 마치고 단원들과 회식 자리로 이동하려고 나서는 순간 가수 심수봉씨가 찾아왔다. 심씨와 한창 신곡 준비 작업을 하고 있던 때라 그 일로 찾아온 줄 알고 일단 차에 타자고 했다. 차에 오르는데 심씨와 함께 온 일행이 있었다. 1년 전쯤 역시 심씨와 함께 만난 적이 있는 아주머니였다. 기억을 더듬으니 모 교회 전도사님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뜻밖에도 그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그럼요. 교회 전도사님이시잖아요. 근데 비가 많이 오는 늦은 밤에 어떻게 두 분이 여기까지 오셨어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전도사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한 마디를 툭 뱉었다.
“하나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순간 나는 머리가 띵 했다. 그리곤 순간적으로 몇 가닥의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머리가 약간 이상한 사람인가? 아니야, 심수봉씨가 데려온 사람이면 그건 아닐 거야. 아마 교회 광신도일 거야. 적당히 따돌리고 빨리 회식 장소로 가야지….’
하지만 그 전도사님은 작심한 듯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자신이 날 찾아오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안양의 어느 교회에서 심수봉씨의 간증집회가 있었다. 심씨가 간증을 하는 동안 성경을 읽고 있는데, 성경책 위로 내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1년 전 잠깐 인사만 나눈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이상해서 ‘하나님의 뜻인가’ 하고 생각했다. 근데 집회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내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심씨랑 나를 찾아왔다.
전도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빨리 회식 자리로 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단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단장님, 요즘 지내기 어떠세요?”
전도사님은 또 다시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갈수록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 입에서는 질문보다 더 이상한 답이 나왔다.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지요. 뭐…”
이게 무슨 말인가.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았다. 세상 누구보다 멋지고 살고 있는 내가 왜 죽지 못해 산다고 했단 말인가.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럼 누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내뱉은 신음이었다. 화려한 외양과는 반대로 외로움과 짓눌림에 괴로워하는 내면에서 나오는 탄식이었다.
“단장님, 더 이상 죄 짓지 마세요!”
“예? 전도사님, 저 죄 많이 짓지 않는데요.”
“아닙니다. 죄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어요.”
이후 전도사님은 잠깐 더 대화를 나눈 뒤 심씨와 함께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진 쪽을 한동안 응시했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처럼 귀청을 울렸다. 온갖 생각들로 뒤엉킨 머릿속이 혼란에 빠졌다. 조금 전 단원들에게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은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서 소주 한 잔 해야지” 하고 너스레를 떨며 바람을 잡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일순간 회식 자리로 갈 생각이 싹 달아났다. 단원들은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만나기 싫었다. 전도사님의 말이 다시 생각나며 이유 없이 노여움이 일었다. 그런 한편으로 죄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는 그분의 말에 긍정의 느낌도 들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차를 몰고 강변북로로 접어들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차창을 마구 두들겼다.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대형차가 내 차를 들이받아 한강으로 처넣을 것만 같았다.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감까지 들었다. 그때 나를 찾아온 그 전도사님은 현재의 전몽월 목사님이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좀 있다 하겠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