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서완석] 아버지가 남긴 가장 소중한 것

입력 2012-03-14 18:00


“함부로 남을 입에 담지 않았던 분… 남 말하기 좋아하는 우리에겐 큰 가르침”

연초에 어머니를 여읜 친구는 꽤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머니마저 떠나보내 고아가 됐다는 슬픔이 그를 칩거하게 만든 것으로 이해했다. 한 달여가 흐른 뒤 알려진 진짜 이유는 그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평소 바른 심성에 비춰 볼 때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바쁜 도회의 일상을 생각하면 자식이 부모의 임종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흉이 아닌 세상이 됐다. 고백하자면 나도 1년여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전날까지 병실을 지키다 동생과 교대했던 날 돌아가신 것이다. 하지만 친구와 달리 그다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나는 그 친구를 만난 날, 위로랍시고 “부모가 남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붙여보았다.

사범학교를 나와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는 부와 명예 어느 쪽도 누리지 못했다. 당시 교사의 적은 봉급으로는 3남 1녀를 다 공부시킬 수 없다며 사업에 손을 댔다가 4년도 못돼 모든 걸 잃고 말았다. 역시 교사였던 어머니의 퇴직금까지 모두 날린 아버지는 50대 초반부터 사실상 경제활동을 접어야 했다.

그 흔한 집 한 채도, 이런저런 유언도 남기지 않은 아버지와의 이별 후 나는 아버지가 남긴 것에 대해 생각해봤고 그리 오래지 않아 답을 찾았다. 내 마음속에 남은 것은 아버지와의 추억이나 말씀 같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일생을 통해 행동으로 보여준 일관된 생활태도였다.

아버지는 평소 말씀이 적으신 분이었다. 그래도 어조는 분명했고 가족들은 아버지 말이면 절대 어길 수 없었다. 아버지 말씀은 적어도 집안에서는 초헌법적이었다. 별 말씀이 없으면서도 아버지의 언어에 힘이 있는 것은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함부로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언어생활은 아버지의 그것과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대화 도중 자신보다 남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즐겨했다. 타인을 쉽게 평가하는가 하면 때론 함부로 비난하기도 했다. 작은 일을 침소봉대해 무책임하게 내뱉기도 하면서 그런 일에 아무런 가책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런 뒷담화를 잘하는 것이 유능한 언어생활이요, 스스로 잘 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그뿐 아니다. 사람들은 대화의 양념이 될 만한 대상을 끊임없이 찾아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대화는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어서 각색도 서슴지 않았다. 비난 대상은 가급적 자신보다 훌륭하거나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상대면 효과만점이었다. 그러는 사이 정작 본인이 피폐해져도 자각할 줄 몰랐다. 경험한 바에 따르면 우리네 대화의 대부분이 이런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는 일생을 통해 남을 입에 담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평생 남을 비난하거나 험담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 접하는 일가친척과 친구는 물론 심지어 사업파트너가 사기를 쳐도 그 자를 원망하거나 욕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항상 말수가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칭찬에도 인색했다. 칭찬은 면전에서, 충고는 뒤에서 하라는 일반 처세론과 달리 면전에서 직언을 하고 칭찬은 남이 보지 않은 곳에서 했다.

말수는 적었지만 아버지는 그 밖의 언어, 즉 행동으로 일관된 가르침을 주셨다. 평생 같은 시간의 취침과 기상, 같은 양의 식사, 선과 악에 대한 일관된 기준, 딸깍발이 같은 꼿꼿한 태도. 그 때문에 아버지가 마지막 일주일을 폐렴과 싸울 때도, 나는 바이러스 정도는 꼭 이겨내실 것으로 굳게 믿었던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만 자식은 부모를 어떻게 품어야 할까. 비록 남긴 재물이나 유언은 없었지만 아버지는 남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은 생활태도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서완석 체육부 국장기자 wssu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