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죄의 용서' 보다 '빚의 탕감' 먼저
입력 2012-03-14 16:08
손석춘 김기석 지음/꽃자리
나무 무늬가 선명한 책상 위에 무채색 책 두 권이 오롯이 놓여 있다. 잿빛 표지의 소설 ‘흑산’과 하얀 표지의 서한집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두 책 모두 기독(基督), 곧 예수가 주인공이다.
소설이 갖는 흡인력이라니, 김훈이 그려내는 흑산의 풍경이 바다를 뒤덮는 안개의 속도로 마음에 날아와 앉는다.
“어부들은 고등어가 바다를 빠른 속도로 건너다니기 때문에 물결의 무늬가 몸통에 찍힌 것이라고 말했다.” “고등어의 푸른 등에 바닷속의 모든 흔들림을 감지하는 관능이 살아 있을 것 같았지만, 관능은 그것을 누리는 자만의 것이었다.”
이 구절에 맞닥뜨리면서 책을 바꾸었다. 언론인 출신 손석춘 건국대 교수와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 각자의 위치에서 소신 있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라 편지글을 통해 등판의 무늬와 관능의 파장을 얼마나 전해 줄지 궁금했다.
‘예수 공부’를 하고 있다는 손석춘 교수가 묻는다.
20대 청년 전태일은 밤낮으로 일하면서도 제대로 먹지 못해 파리하게 시들어가는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을 했다. 주일학교 교사였던 그의 시신을 교회는 자살자라 하여 문밖으로 내쫓았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 한 청년의 외침만큼이라도 소리를 내고 있는가? 50대의 실직자 아버지가 장애인 아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여의도 한복판 가로수에 목을 맸다. 교회에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는가?”
하루하루가 고단한 대구의 60대 택시 기사는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희망으로 세상살이를 견딘다고 쓸쓸하게 말했다. 천국이 과연 이 땅에 사는 인간에게 ‘오직 하나’의 희망이어도 좋은가? 진정한 종교인은 지금 저 고통의 바다에 잠긴 민중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현세와 내세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절망의 현실엔 눈감고 희망을 오직 내세의 일로 돌려도 괜찮은 것인가?”
김기석 목사는 주기도문의 해석으로 물음에 답한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을 양식’이 있는 곳이다.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비참한 삶은 무엇보다 떡으로 위로받을 수 있었다. 예수운동의 특색 가운데 하나가 식탁공동체였으며, 오병이어의 이적은 민중을 감동시켰다.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함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에서 ‘죄의 용서’는 ‘빚의 탕감’으로 바뀌어야 한다. 당시 민중들은 과중한 세금과 이자로 빚에 몰렸고, 그 빚은 결국 자유민을 날품팔이 노동자, 노예로 전락시켰다. 예수님은 이런 비인간화의 과정을 깊이 통찰하셨기에 빚의 탕감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행위임을 일깨우셨다.
‘빚의 탕감’이 ‘죄의 용서’로 환치된 순간부터 사람들은 나눔의 책임은 벗어던지고 용서받은 자의 권리만을 행사하게 되었다. 교회는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종교 권력자들은 기독교를 탈역사화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개인이건 교회건 나라건 빚의 탕감, 곧 ‘분배의 정의’를 요구하는 예수의 뜻을 깊이 새기고 실천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평화로울 것이다.
다시 ‘흑산’으로 돌아오니, 19세기 초, 피 튀기는 박해, 세도정치의 가렴주구, 민중들의 유리걸식 속에 흑산도로 유배간 정약전과 배론의 토굴에 숨어 살던 황사영과 천주교인들은 이런 기도를 했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아비 어미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 마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강옥순(자유기고가, 한국고전번역원 출판부 부장)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