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김명호] 제국의 미래

입력 2012-03-13 18:28


지난해 4월 12일자 워싱턴포스트에는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앞에서 경찰이 양복 입은 한 신사에게 수갑을 채우는 사진이 커다랗게 실렸다. 두 손을 등 뒤로 한 채 공손하게 공권력 앞에 제압당한 이는 워싱턴 시장 빈센트 그레이였다.

그레이 시장과 시의원들은 의회의 예산 타협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평화적이고 충돌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줄 수 있는 의사당 앞 시위 금지 법조항을 어긴 것이다. 그는 7시간 구금된 뒤 다음날 새벽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그 한 장의 사진은 ‘법치란 이런 거다’라거나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다’라는 공자님 말씀을 필요 없게 만든다.

2010년 중간선거 운동이 한창일 때 아이오와주의 한 대로변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 블라디미르 레닌 사진을 나란히 실은 대형 옥외 광고판이 설치됐다. 강경보수 유권자단체 티파티가 내건 이 광고판에는 ‘급진적 지도자들은 두려움 많고 순진한 사람들을 먹이로 한다’는 선동 문구가 내걸렸다.

미국 내 여론이 건강보험개혁법안으로 양분됐을 때, 반대하는 어떤 이는 대통령 행사장 근처에 의도적으로 반자동소총을 차고 나왔었다. 오바마 암살을 의미하는 얼굴 표적지를 내건 이도 있었다. 나름 오바마와 그의 정책을 혐오하고 반대한다는 강력한 의사 표현이다. 백악관 비밀경호국이 혹시 경호위해 요소가 있는지, 연방수사국(FBI)이 테러와 연관성이 있는지, 정황을 살펴보기는 했지만 이들을 잡아가지는 않았다. 표현의 절대적인 자유다.

예일대 법학 교수 에이밍 추아는 저서 ‘제국의 미래’(Day of Empire)에서 미국 등 역사상 초강대국들이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관용(寬容)에 있다고 봤다. 여기서 관용이란 인권과 관련된 좁은 의미가 아니다. 이질적인 개인, 집단이 그 사회에 참여하고 공존하면서 번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말한다. 다원적이고 열려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시스템이다. 반대로 제국의 붕괴는 인종적 종교적 이념적 차별 등 불(不)관용에서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지금 그렇다고 경고한다.

그의 지적은 정확하다. 미국이 제국으로서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한다. 기저에는 점점 짙어만 가는 미국의 불관용이 자리하고 있다. 여론은 이념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갈라져 있다. 이슬람이나 아랍계는 경계의 대상이다. 소수 인종에게는 보다 나은 삶을 가질 기회가 점점 더 적어지고 있다.

붕괴됐던 탐욕스런 금융 시스템은 다시 부활하고 있으며, 양극화 현상은 전에 없이 심화됐다. ‘점령하라’ 시위는 이런 현상을 적확히 표현하는 몸짓이다. 대립만 하는 정치, 빚만 늘어가는 경제, 양극화로 치닫는 사회, 편협해만 가는 문화….

이런 상황에서도 정치 리더십은 선거 때마다 구심력을 작동시킨다. 선거가 치러지는 과정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네거티브 캠페인과 상대방 공격이 펼쳐진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하나의 미국’ ‘애국심’이 정치 리더십의 중심 테마가 된다. 그리고 서로 생각이 다름을 인정한다. 그런 연후에 다시 대결을 진행시킨다. 선거가 끝나면 상처가 더 깊어지고,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더 작동하는 후진국형 정치 리더십이 아니다.

유권자들은 다름을 인정한다. 그리고 정치 리더십은 제국을 위해 구심점을 찾아가려 한다. 이것이 바로 제국을 지탱시켜주는 힘이다. 그것이 100년이 갈지, 200년이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구심력이 작동하는 리더십이 존재하는 한 제국은 망하지 않는다.

워싱턴=김명호 특파원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