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정택 (5) 내 인생 첫 실패 ‘미8군 오디션 낙방’의 교훈

입력 2012-03-12 18:37


나는 막내로 태어난 덕분에 부모님뿐 아니라 형 셋과 누나 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형과 누나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김정택은 있기 어려웠다. 특히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한 큰형(김정호)은 내가 지휘자와 연주자의 길을 가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해주셨다. 백석예술대학 교수인 셋째 형(김정훈)은 내가 서울대 입시를 앞두고 힘들어 할 때 가정교사 역을 자임해주셨다. 거듭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형과 누나들은 탄탄한 바람막이였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분들 덕분에 나는 커면서 조금도 어려움을 몰랐다.

한데 대학 재학 중 내 생애 첫 실패를 맛봤다. 호기롭게 지원한 미8군 연주자 오디션에서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만 것이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결과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내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나. 이럴 줄 알았으면 떠벌리지나 말 것을…’

오디션을 앞두고 나는 ‘될 확률 100%, 안 될 확률 0%’라고 장담했다. 친구들한테는 “앞으로 술값과 당구비는 모두 책임진다”고, 가족들에게는 “미8군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에 외교관이 되겠다”고 허풍을 떨기까지 했다.

그 시절 미8군은 최고의 아르바이트 자리이자 가수나 연주자로 출세하는 등용문 같은 곳이었다. 패티 김이나 윤복희 조영남씨 등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미8군 무대를 발판으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디션 장에서 일어난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디션 장으로 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자 악보 하나가 주어졌다. 익히 아는 비틀즈의 ‘예스터데이’였다. 이쯤이야 하고 악보를 훑어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악보 상단에 원곡의 F 키가 아니라 A플랫 키로 돼 있는 게 아닌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등짝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연주를 시작한 지 30초도 지나지 않아 요란하게 종이 울렸다. 떨어졌다는 뜻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악기라면 못 다루는 게 없는 내가, 한국 최고 대학의 기악과에 다니는 내가 30초 만에 KO를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한남동 미8군 부대에서 이문동의 집까지 울면서 걸었다. 처음엔 부끄럽고 억울하다 나중엔 분노가 일었다. 달리 누구도 아닌 실패자인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렇게 서너 시간은 걸었을까, 마음속에서 오기 같은 게 일어났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속으로는 교만으로 가득 차고, 겉으로는 머리를 치렁치렁 기른 채 있는 대로 멋을 낸 모습이었다.

그날로 나는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연주 연습에 몰두했다. 서점에서 ‘재즈 1001곡’이라는 악보집을 구입해 밤낮없이 연습했다. 특히 즉석에서 조를 옮길 수 있는 이조(移調) 기술을 피나게 연습했다. 결국 나는 모든 키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연주할 수 있는 기술을 완전히 체득했다. 게다가 1000곡이 넘는 재즈곡을 연습하면서 하드록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어 다양한 장르의 연주법을 응용할 수 있게 됐다.

결국 미8군 오디션의 낙방이 내 연주 실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 나는 그때의 실패를 하나님의 복이며 은혜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로마서 8장 28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나의 실패를 기회로 만들어주셨다.

나는 청소년들과 만날 기회가 있으면 꼭 이 경험담을 들려주며 여러 가지 실패를 경험할 수 있지만 실망하지 말라는 교훈을 전해준다. 실패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최고의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그때의 실패는 지금까지 내가 음악인으로서 살아가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어왔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