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종교개혁 순교 역사의 생생한 기록자 존 폭스 (中)
입력 2012-03-12 18:10
무장봉기 주장한 녹스와 달리 폭스는 시대의 아픔에 조용히 귀 기울여
존 폭스 부부는 유럽 대륙의 뉴포트 항에 무사하게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며칠 쉰 다음에 안트베르프,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스트라스부르크로 갔다. 스트라스부르크는 종교 박해를 피해 영국에서 온 이주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영국에서부터 가지고 온 초안을 다듬어 기독교 박해에 관한 역사를 라틴어로 저술해 출판했다. 이 책은 나중에 그가 쓰게 되는 ‘순교자열전’의 초안이라 할 수 있다. 출판할 때 이 책에는 당시에 일어났던 영국의 종교 박해에 대한 기록은 아직 없었다.
폭스는 영국과 관련해서는 15세기에 진행된 롤라드(Lollards)파의 박해만을 다루었다. 롤라드파는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의 종교개혁 운동을 따르는 사람들을 뜻한다.
롤라드파 영국 종교개혁 밑거름
존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의 샛별’이었다. 그는 1370년대 옥스퍼드에서 급진적인 종교적 견해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의 교리를 부인했다. 성서를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보고, 이에 기초한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교황직은 성서적 근거가 없으며,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공격했다.
그는 불가타 라틴어 번역본에 기초했지만, 성경을 영어로 처음 번역했다. 결국 그는 이단으로 몰려 1378년 옥스퍼드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로마 교황청과 런던 주교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종교개혁적 활동을 하다 1384년 12월 29일에 사망하였다. 그가 죽은 지 44년이 지난 후 1428년에 영국교회는 위클리프를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정죄했다. 그의 뼈를 화형시킨 다음 재는 강물에 뿌렸다. 죽은 위클리프를 다시 끄집어내서 화형 시킨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그의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위클리프의 영향력은 롤라드파를 통해 계속 증대되어 왔다. 원래 롤라드라는 말은 ‘중얼거리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중세 네덜란드어 롤라에르트(lollaert)에서 유래한 경멸적인 말이었다. 이 말은 초기에는 경건한 체하지만 사실은 이단 신앙을 가졌다고 여겨진 유럽 대륙의 집단을 지칭했다. 롤라드파는 종교개혁 운동으로 최초의 순교자를 냈고, 영국 종교개혁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1554년 가을에 폭스는 스트라스부르크를 떠나 영국 이민자 교회의 설교자로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원하지 않게 쓰라린 신학적 논쟁에 빠진다. 그것은 존 녹스와 리처드 콕스 사이에서 벌어진 소위 프랑크푸르트 논쟁이었다. 칼뱅은 존 녹스를 잉글랜드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피난해 온 이민자를 위한 목회자로 추천했다.
녹스는 앙리 2세의 종교 박해를 피해 온 프랑스 사람들이 사용하는 예배당을 교회로 함께 사용했다. 그러나 그곳을 함께 사용하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프랑스인들이 사용하는 예배지침서를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프랑스 예배지침서는 녹스도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녹스가 영국 국교회의 ‘공동기도서’에서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녹스는 프랑스 예배지침서를 성경에 근거한 것만 사용해 예배를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해 영국 국교회 추종자들은 불만을 나타냈다. 취리히와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던 영국 이주민들은 대표단을 파견해 항의했다. 결국 칼뱅이 나서서 중재한 다음에 그 ‘볼썽사나운 싸움’을 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다툼은 1555년 3월 리처드 콕스와 그의 일행이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녹스는 청교도와 영국 국교도의 타협 예전을 도입했다. 그러나 충직한 국교도인 콕스는 공동기도서에 따라 예배할 것을 고집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의 총장을 지낸 영국 국교회의 지도자였다. 그는 1548년 ‘성찬 규례’를 초안했고, 1549년과 1552년의 공동기도서 작성에도 참여했다. 한 마디로 예배 의식에 대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였다. 그도 메리의 등극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자 프랑크푸르트로 피신해 온 것이다. 공동기도서를 고집하는 그는 녹스의 예배개혁에 반대했다. 소위 프랑크푸르트 논쟁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종교적 입장을 팽팽하게 견지했다.
녹스와 콕스의 신학논쟁에 휩쓸려
녹스는 성경에 따라 예배드릴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콕스는 성경에 금하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인간이 고안해 낸 것으로도 드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콕스 일행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첫날부터 예배에 불만을 나타내며 소동을 피웠다. 회중의 장로들이 힐난하자, 그들은 이렇게 선포했다. “영국에서 해왔던 대로 행동하고 영국 교회의 면모를 갖추겠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포한 대로 행동했다.
그 다음 주일이 되자 그들은 영국 국교회의 공동기도서에 따른 예배를 보려 했다. 그들 일행 중 한 사람이 회중에게 미리 알리거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강단에 올라가 탄원기도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자 나머지 동료들이 큰 소리로 화답을 했다. 녹스는 이 일을 비난했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을 예배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녹스는 공동기도서에는 아직도 가톨릭의 잔재들인 미신적이고 불합리한 것들이 많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회중에게 강요하려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겠다고 천명했다. 폭스도 녹스와 입장을 같이했다.
그러나 콕스 일행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예배를 볼 것인지 투표로 결정하자고 회중들에게 제안했다. 회중은 반대했지만, 녹스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콕스는 투표를 위해 회중을 선동했고 결과는 녹스의 패배였다. 결국 녹스는 설교 자격을 잃고, 교회 문제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녹스는 1555년 3월 35일에 마지막 설교를 하고 칼뱅이 있는 제네바로 돌아갔다. 녹스와 입장을 같이 했던 폭스도 그곳을 떠났다.
폭스는 분명하게 녹스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 파벌 싸움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나타냈다. 그러한 싸움이 불러오게 되는 폭력으로 인한 혼란과 희생 때문이었다. 폭스가 바젤로 갈 즈음 영국에서는 박해가 한창이었다. 메리 튜더는 피의 메리로 불렸다. 메리 여왕은 1555년 2월 4일 성경번역자 존 로저스를 화형에 처한 후 300명 가까운 종교개혁자들을 스미스필드에서 화형에 처했다.
혁명적 사상과는 거리 멀어
폭스는 영국에서 진행되는 박해를 예의주시했다. 그는 영국 귀족들을 향해 여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박해를 중지시켜 달라는 호소를 담은 팸플릿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호소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의 친구 녹스도 ‘괴물 같은 여성 통치에 대한 첫 번째 나팔소리’라는 유명한 팸플릿을 만들어서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자행되는 종교 탄압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폭스는 녹스의 팸플릿을 보고 여왕에 대해 “격렬하고도 무례하다”고 비판했다. 폭스는 정치적으로 녹스에 비해 덜 과격했고 덜 급진적이었다.
녹스는 청교도적인 입장에서 잉글랜드의 종교 혁명을 시도했다. 그는 무장 반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폭스는 녹스와 달랐다. 그는 녹스처럼 혁명가 기질은 없었다. 녹스가 불 같은 성격의 활동가라면, 폭스는 시대의 아픔에 소리를 기울이고 그것을 조용하게 증언하는 자였다. 그가 증언하는 시대의 아픔은 어떤 것인가?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