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윤태일] 검은 소비자와 ‘쉬쉬 리콜’

입력 2012-03-12 18:26


“항의하는 사람에게만 보상해주는 기업 행태가 소비자를 독하게 만든다”

얼마 전 이른바 ‘백화점 진상녀’가 사기혐의로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국의 백화점을 돌면서 구매한 옷 때문에 본인은 물론 뱃속의 태아까지 고통을 받았다며 피해보상을 요구하여 모두 1000여만원을 뜯어낸 혐의다. 이를 계기로 검은 소비자(black consumer)란 용어가 새삼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제품이나 서비스의 하자를 핑계로 판매기업에 과도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비자다. 이들은 자장면에 철수세미를 넣거나, 빵에 지렁이를 넣거나, 멀쩡한 텔레비전 부품을 고장 내서 피해보상을 요구한다.

이 정도의 범죄는 아니지만 막무가내로 생떼를 부리는 이런 검은 소비자 때문에 일선의 고객업무 담당자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감정노동에 시달리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선량한 소비자까지 피해를 본다. 검은 소비자를 대응하느라 과도한 인력과 시간과 자금이 소모되어 결국은 제품 원가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제품의 하자에 대해서 정당한 보상을 요구를 하는 하얀 소비자(white consumer)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고, 본인도 스스로 괜히 위축되어 주저하게 된다.

검은 소비자가 많아지면서 기업에서도 몇 가지 대응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신속하게 대응하라, 다른 손님 앞에서 과격한 언행을 삼가라, 친절하되 필요 이상으로 굽실거리지 마라, 과격한 언행에 대해서는 녹취하여 증거를 확보하라 등이다. 그런데 여기서 빠진 것이 있다. 불만고객에 대한 기업의 대응자체에 문제는 없는지 기업도 스스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기업은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거칠게 항의하는 소비자에게만 마지못해 보상해주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다른 소비자에게 알려질까 봐 쉬쉬하면서 보상해 준다. 이른바 쉬쉬 리콜이다. 쉬쉬 리콜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무상수리를 해주는 것이다. 리콜은 모든 소비자에게 결함을 통보하고 수리를 해줘야 하지만 자발적 무상수리는 불만을 제기하는 소비자에게만 수리해주면 된다. 그나마도 꼼수를 피우면서 요리조리 빠져 나간다.

이를테면 현대자동차의 펜더부식에 대한 쉬쉬 리콜이 그 한 예이다. 자동차 전문잡지나 인터넷의 자동차 동호회 카페에 따르면, 현대자동차는 싼타페 등 몇몇 차량의 뒷 펜더가 부식되는 문제에 대해서, 거칠게 항의하는 소비자들에게만 그동안 쉬쉬하면서 무상으로 수리해주었다. 그러다가 점점 소문이 퍼지자 지난 2011년 11월 말에 자사 제품의 결함을 인정하고 펜더 부식 수리비의 50%를 분담해주는 지침을 일선 현장에 하달했다(물론 홈페이지 어디에도 공지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막상 일선 현장의 자동차 정비센터에서는 7년 이하의 구형 싼타페만 적용된다며 난색을 표한다. 문제는 2006년부터는 신형 싼타페(CM)가 출시되었기 때문에 ‘7년 이하의 구형 싼타페’란 거의 없다. 마치 ‘뜨거운 얼음’에 화상 입은 사람만 보상해주겠다는 말처럼 실효성 없는 형용모순이다. 독하게 나오는 소비자에게는 무상으로 수리해주면서 하얀 소비자는 이런저런 핑계로 외면하는 것이다.

기업의 대응이 서툴러 화를 자초한 사례로는 삼성 옴니아2가 있다. 초창기 출시된 스마트폰 옴니아에 대한 소비자불만을 삼성은 일부 검은 소비자의 생떼로 치부하여,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져 나가기 급급했다. 소비자의 불만은 증폭되었고, 삼성옴니아 보상대책 카페가 생겼다. 마지못해 보상대책을 내놓았지만, 카페에서는 이미 삼성제품 전체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 11년간 파악한 국내 자동차 결함은 230여 건이지만, 자발적 리콜은 5건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우리 말 속담을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로 이해한다. 생떼 부리는 소비자만 쉬쉬하면서 보상해주는 행태가 소비자를 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기업은 되돌아볼 일이다.

윤태일(한림대 교수·언론정보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