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숭례문을 기다리며
입력 2012-03-12 18:26
성태용 정도준 김찬 유홍준 이건무 최광식 신응수…. 지난 8일 서울 숭례문 복원현장에서 열린 국보 1호 숭례문 상량(上梁) 고유제의 상량문에 기록된 명단이다. 복구 과정 및 공사 참여자 등을 적은 상량문은 문루 지붕 아래 종도리를 떠받치는 들보에 봉안됐으니 복원 이후 다시 소실되거나 철거되지 않는 한 숭례문과 함께 영원히 남게 됐다.
성태용은 상량문을 짓고 정도준은 이를 붓글씨로 썼으며, 김찬은 숭례문 복원공사의 책임을 맡고 있는 현직 문화재청장이고 유홍준 이건무 최광식은 전임 문화재청장이다. 신응수는 목공사를 책임지는 대목장(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이자 공사 전반을 지휘·감독하는 도편수이다. 이들 외에도 상량문에는 분야별로 여러 명의 이름이 기록됐다.
국보 1호에 이름을 올렸으니 영광이기도 하고 그만큼 책임감도 클 것이다. 상량문의 기록대로 2008년 2월 10일, 한 사람의 방화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그것도 국보 1호가 불타 무너져 내렸을 때의 비통함을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누구의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었다.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소홀하게 방치했던 우리 모두의 책임이었다.
숭례문이 소실된 자리처럼 우리 국민의 문화적 자존심은 상처를 받았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내려진 아픈 채찍이었다. 그러나 슬퍼하고 아파할 수만은 없는 일. 숭례문이 몸을 태움으로써 보여준 경계를 받아들여 온전한 모습으로 되살려내자는 결의가 이어졌다. 국민들이 적극 나서 목재를 기증하는 등 복원공사 동참 열기가 식을 줄 몰랐다.
숭례문의 역사는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정문으로 태조 5년(1396년 음력 10월 6일)에 짓기 시작한 숭례문은 태조 7년(1398년 음력 2월 8일)에 완성됐다. 세종 29년(1447)에 문루가 기울어져 이듬해 바로 세웠고, 성종 9년(1478)에 다시 문루가 기울어져 본래의 건축 양식에 따라 이듬해 재건했다.
1907년 일본 황태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버렸다. 그 자리에 도로와 전찻길을 내고 숭례문 둘레에 화강암으로 일본식 담을 쌓았다. 문 앞에는 파출소와 가로등을 설치했다. 6·25 전쟁 중에도 피해를 입어 52년과 54년에 수리했으며 61년부터 3년간 문루 전체와 육축 일부를 해체·수리했다.
숭례문은 12월이면 원형 그대로는 아니지만 614년 만에 거의 제 모습을 찾게 된다. 고증과 발굴을 통해 좌우 성곽 69m(동쪽 53m, 서쪽 16m)를 복원하고, 지반도 일제강점기 때 높아진 30㎝ 정도를 걷어내고 조선 후기의 지면 높이에 맞췄다. 전통 도구를 사용하는 작업으로 형태는 물론이고 공사 과정 자체를 되살리는 데 중점을 뒀다.
앞으로 문루 지붕에 기와를 얹고 단청을 한 뒤 방재시스템 설치 등을 거쳐 가설덧집(가림막)을 해체하면 늦어도 10월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숭례문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방문 신청을 통해 숭례문 복원공사 현장을 찾은 시민은 15만명에 달한다. 하루라도 빨리 국보 1호를 다시 보고 싶은 간절한 열망은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공기(工期)를 맞추기 위한 무리한 공사는 금물이다. 사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전에 불탄 숭례문 복원공사를 임기 중에 끝마치겠다는 계획으로 완공 시점이 결정된 측면이 없지 않다. 기우에 불과하겠지만 너무 서두른 나머지 부실공사로 이어져 광화문 현판 균열의 과오를 되풀이한다면 상량문에 오른 이름들은 두고두고 부끄러움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