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에서 생명을 얻다… ‘보리밭 작가’ 이숙자 화백의 ‘색채 여정’ 개인전

입력 2012-03-11 18:05


바람에 물결치는 보리밭에는 싱그러운 내음이 가득하다. ‘보리밭 작가’ 이숙자(70) 화백이 4월 1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펼쳐놓을 초록빛 보리밭 그림을 바라보면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게 된다. 누렇게 물든 황금빛과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다소 이국적인 보랏빛 물결 등 다양한 보리 작품들이 충만한 생명력과 삶의 환희를 전한다.

작가는 1970년대,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파릇파릇 솟아나는 보리밭의 힘찬 생명력에서 영감을 얻어 이 작업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79년에는 보리 알맹이를 그린 작품으로 국전 특선을 차지하고, 이듬해 역시 보리 작품으로 국전 대상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에게는 ‘보리밭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후 40여년 동안 보리밭 그림을 그려왔다.

하지만 고민도 있었다. 그리고 싶은 것도 많은데 보리만 그리다 작가 인생이 끝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고심을 거듭하다 80년대 후반부터 보리밭 대신 한국적 정서를 담은 소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보리밭을 당장 완전히 없애기는 어려워 황금 보리밭에 소들이 있는 작품을 내놨다. 이를 통해 보리밭 작업과 결별하겠다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담았다.

이후 실험적인 작업을 이어가기는 했지만 보리밭만 보면 붓질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시작한 작업이 보리밭과 여성 누드화를 결합한 ‘이브의 보리밭’ 시리즈다. 눈이 크고 코가 오뚝한 서구형 미인들이 보리밭에서 과감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파격적인 작품이다. 남성 중심의 시대에 맞서 굳세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여성의 모습을 담았다.

오랜 세월 보리밭 작업을 이어오면서 자신의 미적 관점도 변해왔음을 깨달았다는 작가는 이제 보리밭 그림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다고 말한다. “이 작업을 계속하면서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창작에 대한 압박감이나 긴장과 불안 같은 스트레스를 잊고 마음의 안정도 얻었어요. 그때 보리밭 작업을 포기했더라면 그 시절의 보리밭으로 끝났을 텐데 다행이지요.”

순백색의 종이 다섯 겹을 덧대어 만든 캔버스에 에메랄드와 수정 등 보석을 갈아 만든 전통 안료로 보리 알맹이를 한 올 한 올 채색하고 수염을 정밀하게 그려내는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노년기에 들어서면서 건강과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그는 이제 자신이 가장 편하게 잘 그릴 수 있는 누드화 작업에 비중을 더 두기로 했다.

2007년 고려대 교수에서 정년퇴직한 뒤 처음 갖는 이번 개인전은 ‘이숙자의 색채 여정’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의 초기작부터 대표작 ‘보리밭’과 ‘이브’ 연작 등 작품세계 전반을 보여주는 회화 40여점과 크로키 30여점을 선보인다. 이 가운데 푸른 장미모자를 쓴 자화상 ‘즐거운 인생’은 최근 병원에서 퇴원한 후 그린 그림이다. 작가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02-720-102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