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정인교] 공청회 문화 이대론 안된다
입력 2012-03-11 17:47
지난달 25일 오전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위한 공청회가 농민단체의 단상 점거와 몸싸움으로 파행을 겪었다. 단상을 점령한 이들은 마이크선을 차단하고 발언대를 부수는 등 행사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오후에 열린 공청회에서도 단상 앞부분을 점령한 반대단체들은 발표자와 지정토론자의 발언을 조직적으로 방해함으로써 공청회를 무산시키려 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몇 년 전 미국 무역위원회(USITC)에서 목격한 공청회를 떠올리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공청회장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시설물을 파손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규율한다. 이해집단의 입장을 정책결정자에게 설명하는 기회로 적극 활용할 뿐 어느 누구도 감히 공청회장을 무법천지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또 다른 차이점은 사실보다 부풀리거나 객관적 자료로 뒷받침되지 않는 주장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지적하는 전문가 집단이 배심원처럼 단상에 앉아 공청회를 주재한다는 점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이들이 너무 정확하게 정곡을 찔러 이해관계자 발언의 문제점을 지적하기에 어설프게 발언했다가는 공청회에 발언하지 않은 것만 못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당일 공청회장을 찾은 400여명 참석자 가운데 절대 다수의 사람은 한·중 FTA 협상에 기대감을 갖고 있었고, 새로운 사업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참석했다.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지속적으로 고성장을 유지하는 중국의 내수시장을 뚫는 데 한·중 FTA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특정 농민단체가 물리력으로 공청회를 무산시키려 한 것은 지난해 말 입법된 통상절차법에서 FTA 협상 전에 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하도록 한 강제조항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즉 공청회가 무산되면 중국과의 FTA 논의도 더 이상 진전시킬 수 없다는 법 규정을 이용한 것이다. 공청회 파행은 공무원 연금개혁, 서울대 법인화, 교원평가제, 뉴타운 개발 정책, 전력산업 구조개편, 약사법 개정 등 중요한 정책마다 나타나고 있다.
이해관계자의 입장을 수렴하라는 법 취지보다 공청회라는 절차를 지키지 못하도록 폭력적인 시도가 난무한다면 공청회 제도의 실효성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국개발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OECD 30개 회원국 중 우리나라의 법질서 준수 수준은 최하위나 다름없는 28위로 나타났고, 법질서 준수 수준이 한 단계만 올라가도 연평균 성장률이 0.99%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처럼 공청회장에서 폭력시위를 벌이는 것은 질서 위반에 대한 우리나라의 처벌이 훈방 등으로 경미하고, 이해관계자의 떼쓰기를 달래기 위해 후한 보상금을 주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칠레와의 FTA 이행과정에서 피해산업이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농심(農心)을 달랜다는 구실로 매년 2000억원의 예산을 지출했고, 미국과의 FTA 비준과정에서도 24조1000억원의 농업지원 대책이 마련돼 있다.
FTA로 인해 농업 부문에서 피해가 예상되므로 보완대책을 세우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피해가 발생하는 품목이나 피해농민에 한해 보상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즉 피해를 부풀리거나 떼쓰기를 통해 재정지원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기대심리를 차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청회도 한 번만 열 것이 아니라 주요 분야별로 나누어서 개최하고, 서울뿐만 아니라 주요 지방에서도 열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여 의견을 개진하는 건전한 공청회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 한국협상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