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0) 라벤나의 성화(聖畵)

입력 2012-03-11 20:11


성화는 초대교회 신앙관이 담긴 ‘복음, 또 하나의 그릇’

서구의 교회 특히 가톨릭이나 정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피할 수 없이 만나는 것이 성화(聖畵)나 성상(聖像)이다. 그림, 모자이크, 프레스코, 조각, 석상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성화, 성상들은 우리에게 이것들이 우상이냐 예술이냐의 오래된 논쟁 앞에 서게 한다.

주로 예수님, 열두 제자 등 성경의 인물들을 묘사한 것이지만 때로는 교황, 마리아, 성인, 황제 등의 형상도 있어 우리의 판단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성화, 성상은 교회사에 엄연히 존재해 왔고 지금도 다른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신앙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볍게 여길 주제는 아니다.

이탈리아의 라벤나는 필자에게 이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라벤나는 현재 이탈리아 동북부 아드리아 해변에 위치해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사실은 한때 서로마제국의 수도(주후 402∼476)이기도 했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라벤나는 위치 때문에 로마제국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그곳은 우선 아드리아 바다를 지키는 곳에 위치했으며 북쪽에서 내려오는 야만족을 막아야 했던 곳이기도 했다. 라벤나는 일반인에게는 단테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유산이 8곳이나 있는 곳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우리에게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남긴 성화, 모자이크 등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 세계를 엿볼 수 있어서 중요하다.

라벤나를 대표하는 교회는 산 비탈레(San Vitale) 교회이다. 이 교회는 주후 548년 비숍 막시미안에 의해 초대교회의 전설적인 순교자 비탈레의 이름으로 봉헌된 교회다. 주후 548년이라면 비잔틴 시대의 한복판이고 또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뒤 2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시기이다.

이 교회 안에는 그 시대의 모자이크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대부분 성서 이야기를 담은 모자이크는 1500년을 뛰어넘어 콘스탄틴 이후 200년을 산 비교적 초기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조명해 준다. 먼저 중앙으로부터 보면 교회 천장 한 중앙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 그는 계시록이 말한 대로 보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린다. 그의 팔은 두 곳을 향한다. 한 곳은 성경으로 교회를, 다른 곳은 왕관으로 세상을 가리킨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이 다스리는 두 세계를 보여준다.

강단 좌우에는 네 생물이 나타난다. 사자와 소와 사람과 독수리다. 이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네 속성 혹은 복음서의 네 가지 특징을 우리와 같이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자는 왕을 상징하고 마태복음을 의미한다. 소는 섬김을 상징하고 마가복음을, 사람은 인성을 의미하고 누가복음을, 독수리는 신성을 의미하고 요한복음을 상징한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의 네 속성이다.

강단 왼쪽에는 아브라함 사건이 나타난다. 아브라함에게 세 천사가 찾아왔고 아브라함은 송아지를 잡아 그들을 대접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드릴 때 하나님의 손이 그것을 막는다. 천장 꼭대기에는 어린 양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네 방향으로 천사들이 어린 양을 경배하고 있다. 그것은 어린 양 예수를 높이는 요한계시록의 그림이다.

강단 왼쪽에는 아벨이, 오른쪽에는 멜기세덱이 각각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린다. 아벨은 양을, 멜기세덱은 떡을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손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 열두 제자가 있다.

비탈레 교회 모자이크에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양이다. 양도 다양하다. 아벨의 양, 아브라함의 번제의 양, 모세의 호렙산 양, 그리고 승리자이신 어린 양 같은 그림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 시대 성도들의 신앙의 관심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비탈레 교회 성화에 나타난 아주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오직 성경에 나오는 인물만을 그렸다는 것이다. 후대에 보이는 교황이나 성인, 심지어 마리아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리아에 대한 존숭이 초대교회부터 있었음을 생각할 때 매우 특이한 일이다. 이 시대 그림의 초점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를 위해 양처럼 헌신적으로 사는 성도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비탈레 교회 성화 중에 마리아나 교황, 성인들의 모습이 없다는 것이 필자에게 큰 깨달음을 갖게 했다. 그것은 교황, 마리아상과 같은 것들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과 성화나 성상은 그 시대 성도들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그 시대에 성도들이 믿고 고백한 것이 그 시대 그림이나 조각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렇다. 처음부터 마리아 상이나 성인 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어도 6세기까지만 해도 그렇다.

그렇다면 성화와 성상은 무엇인가? 단호하게 우상이라고 배격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개혁자, 특히 츠빙글리가 그랬다. 츠빙글리는 1524년에 시민, 시당국의 협조를 얻어 건축가, 석공, 목수들을 대동하고 그로스 뮌스터 교회에 들어가 거기에 있는 성화, 유물, 십자가고상, 제단, 초 등 장식물을 다 제거하고 프레스코화는 걷어내고 벽은 회로 칠했다. 성화는 불태웠고 심지어 오르간마저도 치웠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예배를 위한 우상숭배의 요소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그림을 예술작품으로 간주하여 신앙에 도움을 주는 한에서 교회에 남겨두도록 했다. 개혁자들의 공통된 관심은 예배의 대상이 되는 우상은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든 성화, 성상, 성물들은 우상숭배의 위험이 없을 때에만 존속할 수 있고 우상숭배의 여지가 있을 때는 단호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든 성화에 다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것은 지나치다. 교회의 성화는 복음을 말하는 교회의 또 하나의 언어일 수 있다. 교회의 언어가 설교로만 제한된 것이 우리 기독교의 한계일 수 있다.

복음을 그림의 형식으로 고백한 것은 중세기가 처음이 아니다. 로마의 카타콤에 가보라. 내일이면 죽을 성도들도 자신들의 신앙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 경우 그림은 그들이 믿는 복음을 표현하는 마지막이며 유일한 수단이었다. 상징은 우리가 복음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상징과 그림은 콘스탄틴 이후 많은 이방 개종자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8, 9세기에 있었던 성상파괴 운동에도 불구하고 교회역사에서 한 번도 성화, 성상은 사라진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표현적 본능 외에도 성육신을 통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전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몸을 입고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그 속에 복음의 내용과 형식이 함축되어 있다.

복음은 다양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물론 그 경우의 표현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을 담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 예술이 복음을 담는 그릇인 한 그것은 더 발전되어야 한다. 복음과 예술은 함께 간다. 교회 예술은 상징의 형태로 표현된 그 시대의 복음이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기도 하지만 보기도 한다. 복음의 진수를 드러낸 라벤나의 그림이 그립다.

산 비탈레 교회 성화의 특징

-대부분 성서 이야기를 그림으로

-예수님이 다스리는 교회와 세상, 두 세계를 보여줘

-사자(왕/마태복음), 소(섬김/마가복음), 사람(인성/누가복음), 독수리(신성/요한복음)는 예수님과 복음서 네가지 특징을 우리와 공유한다는 뜻

-많이 등장하는 주제가 양… 어린 양때문에 희생하신 예수님, 양처럼 헌신하는 성도들의 삶을 담아

-오직 성경에 나오는 인물만 그려. 교황이나 성인, 심지어 마리아도 없어. 오직 십자가 예수님과 성도들에 초점. 이것은 적어도 6세기전까지는 교황이나 마리아상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

<한신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