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정택 (4) 예배당 신발 흩뜨리기 선수였던 개구쟁이가…

입력 2012-03-11 18:14


어린 시절의 나는 대단한 개구쟁이였다. 워낙 장난기가 심해 거의 악동 수준이었다. 나의 장난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신발 흩뜨리기는 내 주특기였다.

어릴 때 우리 가족이 출석하는 교회는 마룻바닥에 방석을 깔고 예배를 드리는 곳이었다. 나는 예배 중에도 이런 저런 장난질을 하다가 목사님의 축도 순서가 되면 살며시 밖으로 나가 예배당 현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을 마구 흩뜨려 놓았다. 그리곤 교회 마당으로 나와서 현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며 즐겼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어른들이 저마다 자기 신발을 찾느라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물론 어른들은 나의 소행임을 알았지만 아무도 야단을 치지 않았다.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하면서 ‘아이고, 이 장난꾸러기’ 하는 분은 가끔 있었다.

당시 이런 저런 장난으로 ‘악행’을 일삼던 내가 끝내 이루지 못한 게 하나 있었다. 장난 거리를 찾기만 하면 기어코 해내던 내가 헌금 주머니로 잠자리를 잡는 건 미수에 그쳤다. 긴 막대에 헌금 주머니를 매달아 성도들에게 돌릴 때마다 나는 ‘저걸로 잠자리를 잡아야지’하고 별렀으나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인기 짱’이었다. 생김새도 예쁘장했지만 그보다 피아노를 잘 친 덕분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그때 남자 아이가 피아노를 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연히 또래 아이들에게 나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 뒤에는 항상 여자 친구들이 줄을 이었다. 모두가 음악에 큰 관심과 조예가 깊으셨던 아버지 덕분이다.

어쨌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나는 상당한 소질을 보였던 것 같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과 누나들,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들었으니 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트럼펫에 심취했다. 우연히 들은 ‘밤하늘의 트럼펫’이라는 곡에 매료된 나는 당장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경기중이나 서울중에 들어갈 실력이 됐지만 배재중에 입학했다. “예수믿는 사람은 기독교 학교에 가야한다”는 아버지의 소신 때문이다. 아버지는 우리 6남매를 모두 미션 계통의 중·고교에 보내셨다.

중학교 때 더욱 음악 재능을 발휘한 나는 서울예고를 택했다. 고입 실기 시험엔 트럼펫으로 응시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프렌치 호른의 매력에 빠졌다. 훗날 서울대학교 음대 기악과에 입학해서는 오히려 전공을 드럼과 기타로 바꾸고, 지휘와 피아노를 부전공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이미 대학 시절에 나는 웬만한 악기를 다룰 줄 알게 됐다. 대학에 다니면서는 그룹사운드에 들어 용돈을 쏠쏠하게 벌어 썼다.

나의 10대는 천방지축이었다. 음악을 한답시고 세상이 좁다고 친구들과 여기저기 싸돌아다녔다. 그러니 신앙생활에는 별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와 집에서 지겹게 듣는 성경과 하나님 이야기를 교회에서까지 들어야 한다는 게 내게는 고역이었다. 단조롭게 느껴지는 찬송가도 도통 재미가 없었다. 늘 어떻게 하면 학교 채플이나 교회 예배에 빠질까 하는 생각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예배에 참석하면 예배 시간 내내 엉뚱한 짓을 하거나 부족한 잠을 보충했다. 다만 재미있는 행사를 하거나 부모님으로 받은 헌금으로 군것질을 할 때면 교회가 고마웠다.

그래도 그때 교회에 다녔던 것이 내게는 보약이었다. 당시 나는 정동제일교회에 다녔는데, 억지로 드린 예배와 마지못해 한 성경공부를 통해 신앙생활의 기초를 닦았으니 말이다. 그냥 교회에 다니는 사람(churchgoer)에 그쳤지만 목회자 섬기는 법이나 예배에 임하는 자세 등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신앙인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란 건 내 인생 최대의 행운이다.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가장 감사하는 부분이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