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3) 신사참배 강요

입력 2012-03-11 18:13


참배강요에 맞선 한국교회 ‘고난의 10년’

1930년대 일제 치하에서 한국교회가 당한 가장 큰 수난은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였다. 일본은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 하에 전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한국에서는 1935년부터 강요되었다. 이때부터 1945년 광복까지 마지막 10년은 한국교회가 국가 권력과 대결했던 ‘고난의 10년’이었다.

신사란 신도(神道) 의식을 행하는 종교적 시설물로 이곳에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한 것이 신사참배 강요였다. ‘신도’란 일본의 토착적인 원시종교인데, 다신론적이며 자연숭배적인 일본 고래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국조신(國祖神)이라고 하는 태양신, 곧 천조대신(天照大神)과 그 이후의 종신(宗神)을 섬기며, 또 천황(天皇)을 현인신(現人神)으로 섬기는 일종의 민족종교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신도는 태양신을 섬기는 원시적 자연숭배 종교에 민족적 성격을 가미한 국교화 된 종교였다.

태양신 숭배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미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고대 페르시아, 잉카제국, 인도 등지에도 태양신 숭배사상이 있었다. 고대 이집트가 최초의 태양신 숭배 문명이었다고 한다면 일본은 이전의 태양신 숭배 사상을 계승한 대표적인 현대국가라고 할 수 있다.

1300년 전부터 사용되고 있는 일본 국기 히노마루에는 흰 바탕에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원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태양신 숭배사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日本)이라는 국명 자체도 ‘태양의 기원’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1945년 패전하기까지 천황은 인간의 몸으로 지금 세상에 살아 있는 ‘현인신’으로 간주되었고 태양신의 아들로 숭배되었다. 천황은 태양신 아마데라스의 후손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린다는 만세일계(萬世一係) 신앙이 바로 신도(神道)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 이후 일본은 천황제 국가로 신도를 기본이념으로 받아들였다. 1882년부터는 신도를 국가적 종교로 전 국민에게 참배토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도는 종교가 아니고 국가에 보은하는 국민도덕’이라고 규정하였다.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강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도라는 종교적 성격을 ‘비종교화(非宗敎化)’한 것이다.

신사가 한국에 처음 세워진 것은 1678년이었다.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금도비라신(金刀比羅神)을 모신 사당을 세웠는데, 그것이 한국에서의 최초의 신사였다. 이 신사는 1894년에는 ‘거류지 신사’로, 1900년에는 용두산 신사로 개칭되었다. 1910년 당시 우리나라에는 31개의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신사는 일차적으로 조선에 거류하는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5년에는 조선에서의 신사제도 총본산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이 서울 남산에 건립되었는데, 이것은 향후 조선에서도 신도를 확산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신사에 대한 참배가 강요되지는 않았다.

1930년대 중기부터 신사참배가 강요된 것은 일본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일본은 1931년에는 만주침략을 강행하였고, 1932년 ‘5·15사건’을 통해 군국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후 전시체제로 돌입하였다. ‘5·15사건’이란 1932년 5월 15일에 일어난 일본제국 해군 급진파 청년 장교 중심의 반란 사건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수상 관저에 난입해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수상을 암살했다. 이때부터 일본의 정당 정치는 쇠퇴하고 군국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1931)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軍國主義)의 확산과 더불어 신사참배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일제는 군국주의 체제로 소위 대동아권(大東亞圈) 형성을 꿈꾸면서 신사에 대한 참배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이것은 신도라는 종교를 가지고 천황중심주의의 이념적 통일을 꾀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신사에 대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본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도록 요구하는 동방요배(東方腰拜), 일본국기 게양, 그리고 일본 황제에게 충성을 맹약하게 하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의 제창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사참배 강요는 소위 ‘국민정신 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운동’의 일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대륙병참화 정책을 수립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 황민화 정책(皇民化政策)을 실시했으며 이 정책의 거점을 신사(神社)에 두었다. 이런 필요에서 일면일신사주의(一面一神社主義)를 강행하여 전국에 신사(神社, 神祠)를 건립하고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20년대 이후 신사는 꾸준히 건립되어 1935년경에는 3백여 개 처소에 벧셰메쉬, 곧 태양신전인 신사가 건립되어 있었다. 이것은 곧 시작될 한국에서의 수난과 박해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