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빌라 아말리아’ 펴낸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 “내부의 불이 있는 후미진 쉰살 건너가기”
입력 2012-03-09 18:30
프랑스 최고 문학상인 공쿠르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64)의 장편 ‘빌라 아말리아’(문학과지성사)는 우리 내면에서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수동성을 깨닫는 순간, 하나의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넘어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공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안 이덴. 마흔일곱 살인 그녀는 16년 동안 함께 살아온 남편 토마와 결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안의 결별 선언은 겉으론 토마의 외도를 참다못해 내린 결정이지만 그 내면은 훨씬 복잡하다. 오히려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자기 안의 위선을 직시하면서 현재의 삶을 수선하기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출발을 선택하겠다는 능동성의 결단인 것이다. 수동성과 능동성의 대비가 소설의 작동법인 셈이다.
안은 우선 지금까지의 삶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다. 과거에 속한 일체의 것과의 결별, 즉 직장과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집과 피아노와 가구를 매각하며 은행계좌와 신용카드를 폐쇄한다. 옷과 가방과 핸드백도 폐기하는가 하면 아버지의 사진을 포함, 앨범 속 모든 사진들을 소각한다. 이런 일련의 행위는 마치 임종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자기 안의 사회적 자아를 죽여서 부활을 꾀하려는 몸짓처럼 읽힌다. 과거와의 단절을 끝낸 그녀는 유럽 일대를 여행하다가 이탈리아 나폴리만의 이스키아 섬에서 찾아낸 ‘빌라 아말리아’, 즉 아말리아 가문의 집을 전세로 얻어 후반기 삶을 꾸려나간다. 그녀는 왜 ‘빌라 아말리아’를 선택했을까.
“그녀는 지아 아말리아의 집을, 테라스를, 만(灣)을, 바다를 열정적으로 강박적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모든 사랑에는 매혹하는 무엇이 있다. 우리의 출생 한참 후에야 습득된 언어로 지시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된 무엇이 있다. 한데 그토록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은 이제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오라고 부르는 집이었다. 그녀가 매달리려는 산의 내벽이었다. 풀과 빛과 화산암과 내부의 불이 있는 후미진 곳이었다.”(156쪽)
‘내부의 불이 있는 후미진 곳’이야말로 쉰을 바라보는 그녀 자신의 내면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 키냐르는 “나이가 들수록 첫 눈에 사람보다는 장소에, 그리고 자연에 매료되는 일이 점점 자주 일어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빌라 아말리아’라는 장소가 인물로 등장하는 그의 첫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안은 ‘빌라 아말리아’에서 의사 레온하르트를 만나고 그의 어린 딸 레나와 각별한 사이가 된다. 또 그곳에서 새롭게 만난 친구 쥘리에트에게 레나의 보모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세 살배기 레나와 쥘리에트와 안, 세 여자는 그들만의 특별한 사랑을 나누며 풍요로운 시간을 만들어간다. 하지만 땅콩이 기도를 막는 바람에 레나가 숨지자 이들의 공생 관계는 종지부를 찍는다.
“공생 관계에서는 각자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상대방을 사정없이 착취한다. 만일 하나가, 우연히, 상대방을 과도하게 착취하는 경우, 그로 인해 파트너는 질식한다. 상대방이 굶주리게 되면 그 자신도 죽는다. 공생 관계를 균형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318쪽)
소설은 안이 ‘빌라 아말리아’를 떠나 프랑스로 귀환하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지만 작중 인물들이 그려낸 크고 작은 교집합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