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선포 전야, 스릴·로맨스 & 왕의 고뇌… 커피를 통해 고종암살 음모 그린 영화 ‘가비’
입력 2012-03-08 20:47
‘가비(加比)’는 커피(Coffee)의 영어 발음을 따서 부른 고어(古語)로, 조선시대에는 ‘가비차’ 또는 ‘양탕국’으로 불리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으로 들어온 시기는 대략 1890년 전후로 추정된다. 1896년 2월 21일,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피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른바 ‘아관파천’ 이후 그는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영화 ‘가비’는 커피를 통해 벌어지는 고종 암살음모를 그렸다.
김탁환의 소설 ‘노서아 가비’를 원작으로 한 ‘가비’는 고종과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라는 가상의 여인, 이 여인을 목숨 걸고 지키는 한 남자의 사랑을 버무린 ‘팩션’(팩트+픽션) 영화다. 요즘 안방극장에서 불고 있는 사극 열풍과 젊은층이 좋아하는 직종인 바리스타를 내세우고, 1997년 ‘접속’으로 스타덤에 오른 장윤현 감독이 ‘황진이’ 이후 5년 만에 연출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고종 곁에서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 역에는 ‘체인지’ 이후 15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김소연, 그녀의 연인 역에는 주진모, 고종 역에는 박희순이 각각 맡았다. 지난 6일 시사회에서 장 감독은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김소연씨가 좋은 이미지로 열심히 연기하는 걸 보고 주인공으로 낙점했다”고 밝혔다. 남자 주인공 주진모도 “여배우 기근에 시달리는 충무로에 좋은 배우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추어올렸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대한제국을 준비하던 혼돈의 시기, 조선 출신인 따냐(김소연)와 일리치(주진모)는 러시아 대륙에서 커피와 금괴를 훔치다 쫓기게 된다. 러시아군에 붙잡힌 두 사람은 조선계 일본인 사다코(유선)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이후 일본 공사 미우라(김응수)의 음모로 따냐는 바리스타로 고종에게 접근하고, 일리치는 사카모토라는 이름으로 이중 스파이가 된다.
조선을 통째 삼키려는 야욕에 불타는 일본은 따냐를 통해 커피에 독을 타 고종을 살해하려 한다. 그러나 외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려는 고종의 외로운 싸움에 연민을 느낀 따냐는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조선 왕 암살작전을 두고 벌어지는 스릴에 액션 로맨스를 가미한 영화는 정치적인 고립상태에 있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까지 역사적인 사실도 덧붙여 재미를 추구했다.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장치들이 긴박감 있게 유기적으로 잘 어우러지지 못해 관객들을 사로잡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심리 묘사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느낌이다. 김탁환의 또 다른 소설 ‘열녀문의 비밀’을 영화화해 흥행에 성공한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처럼 탄탄한 드라마를 바탕으로 유머와 재치 넘치는 구성이 아쉽다.
그러나 장 감독과 다른 배우들의 칭찬대로 정갈하면서도 요염한 다중 캐릭터를 연기한 김소연에게 박수를 보낼 만하다. 커피 맛에 대한 감회를 혼돈의 구한말 당시 힘겨운 상황에 비유한 고종의 말이 여운을 남긴다. “나는 가비의 쓴 맛이 좋다. 왕이 되고부터 무얼 먹어도 쓴 맛이 났다. 헌데 가비의 쓴 맛은 오히려 달게 느껴지는구나.” 15일 개봉. 15세 관람가.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