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의구] 공천 불복

입력 2012-03-08 19:58


4·11 총선 공천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공천 불복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 모두에서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거나 같은 정파 혹은 다른 정파와도 연대를 모색하겠다는 발표가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공천 불복은 험난한 길이다. 일반 국민들의 정서가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에 독배가 되기도 한다.

최근 우리 정당사에서 무더기 공천 불복 사태가 빚어진 사례로 16대 총선 당시 민주국민당(민국당)과 18대 총선 때 ‘친박연대’를 들 수 있다.

명분 없는 저항 毒杯될 수도

2000년 16대 총선 직전 확정된 제1야당 한나라당의 공천 결과는 ‘참극’이라 부를 만했다. 노태우 김영삼 정부 출범에 핵심역할을 해 ‘킹메이커’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5선의 김윤환 의원과 이기택 부총재, 신상우 국회부의장, 김동주 의원 등이 줄줄이 탈락했다. 반발한 거물 정치인들은 민국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총선 결과는 실패였다. 지역구 1석, 비례대표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민국당은 2004년 총선에서 단 1석을 얻지 못해 해산됐다.

2008년 총선에서는 친박근혜계 의원들이 공천에서 대거 탈락했다. 공천에서 소외된 의원들이 탈당해 ‘친박연대’를 만들었다. 급조된 정당이었지만 지역구 6석과 비례대표 8석 등 14석을 얻었다. 친박연대를 택하지 않았던 무소속 연대도 12명이나 생환했다. 반면 공천 실무를 맡았던 이방호 사무총장과 정종복 제1사무부총장 등이 줄줄이 낙선했다.

민국당과 친박연대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여러 원인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명분 문제다. 민국당의 경우 당시 이회창 총재가 공천의 기치로 내걸었던 세대교체와 3김 청산이 유권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이는 당시 원희룡 오세훈 등 386 신진세력들을 영입한 한나라당이 133석으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을 누르고 제1당 자리를 지킨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도 새로운 정치를 갈망하는 민심이 분출된 것을 보면 공천 탈락 불복에 호의적 여론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친박연대의 경우는 공천 탈락이 민심을 얻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 대선 경선 상대였던 박근혜 의원을 견제해야 한다는 공천의 명분은 작위적인 편가르기라는 비난에 부딪쳤다. 대선 경선 패배를 순순히 받아들였던 박근혜 의원이 탈당자들의 선거지원을 자제한 것도 한몫을 했다. 국민들의 요구는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새로운 정치를 하라’는 쪽으로 표출됐다.

국회의원들에게 공천은 정치를 하는 대의명분만큼이나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정치인이라도 의정단상에 서지 못한다면 국민들에게 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박탈당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에 반발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권력본능보다 민심을 읽고 따를 줄 알아야 한다. 공천 받으면 당선될 수 있다는 자기계산만 고집해 단세포처럼 반응할 게 아니다. 유권자들이 정치에 거는 기대, 소속 정당이 설정한 방향 등을 굵직하게 가늠해야 한다.

민심 읽고 단련 기회로 삼길

명분 없는 공천 불복종은 정치 생명 자체를 위협한다. 고집스레 불복의 길을 걷다간 자리와 이익만 밝히는 ‘소인배’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다 보면 ‘철새’로 분류돼 삼류 정치인 부류로 떨어진다.

역설적으로 공천 탈락은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역량과 그릇의 크기를 보여줄 기회도 제공한다. 추워진 뒤 송백의 절개가 드러나는 법이다. 특히 큰 정치를 꿈꾸는 정치인이라면 패배를 자성과 단련의 기회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국민들은 보지 않는 듯해도 보고 있고, 알지 못하는 듯해도 판단하고 있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