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해방의 사순절, 함께 가는 길
입력 2012-03-05 18:21
몇 해 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관광객들에게 기념품으로 인기 있는 선물 가운데 하나인 무 모양을 한 작은 나무 조각품을 사온 적이 있다. 이 조각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소녀, 개, 고양이, 쥐의 여섯 모양이 새겨져 있다. 러시아의 옛 민화를 소재로 한 조각품이라 한다. 레브 할아버지와 올가 할머니에게 손녀 카티야가 있었다. 카티야는 틈만 나면 말썽을 일으키는 장난꾸러기여서 어느 주말, 카티야의 부모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카티야를 남기고 휴가를 떠났다. 휴가를 떠난 부부에게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기고 휴가는 길어졌다. 집에 남은 할아버지. 할머니, 말썽꾸러기 소녀 카티야는 점점 식량이 떨어져 굶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집 앞의 밭에서 엄청나게 큰 무를 발견한다. 온 집안의 식구가 식량을 발견하고 큰 무를 뽑으려 했지만 도저히 뽑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카티야 심지어 그 집에 함께 사는 개와 고양이도 힘을 합쳐 무를 뽑아보려 애썼지만 불가능해 보였다. 이때 고양이가 제안을 한다. “천장에 사는 쥐라는 놈은 못생기고 나쁜 짓만 골라 하는 약삭빠른 놈이지만, 그 동안의 원한 관계나 체면은 잠깐 덮어두고 그 놈의 도움을 빌리면 어떻겠습니까?” 이 제안이 채택되어 평소에 미움만 받던 깜둥이 쥐가 등장했다. 쥐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 무에 붙은 잔뿌리들을 모두 갉아 끊어 버렸다. 마침내 집채만큼 큰 무도 쉽게 뽑혔고, 온 식구들이 무를 식량으로 해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전설 같은 민담이다. 평소에 천대받고 차별 받던 깜둥이 쥐도 한 가족의 생명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이 러시아 민담의 교훈은 너무나 선명하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생명은 아무 것도 없으며, 누구나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을 외모나 행동으로 판단하여 얕보거나 차별해서는 안 되며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해 주고 조화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와 삭개오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 선도에 헌신해왔던 의사라고 알려져 있고 흔히들 ‘박애주의자 누가(Humanist Luke)’라 말한다. 누가복음에는 특별히 당시 소외된 사람들과 유대인으로부터 배척과 질시를 받아오던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배려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돈 많은 세관장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누가의 관심을 잘 드러내는 이야기다.
여리고 세무서 소장인 삭개오는 예수께서 자신의 마을을 방문하셨을 때, 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를 ‘멀찍이서 관찰했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키가 작아서 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것은 이유 중 일부였을 것이다. 당시 세무서 소장은 로마의 군대까지 동원할 수 있는 군사 지휘권까지 부여받은 마을 최고 권력자였다. 그러나 그는 잎이 넓고 무성한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를 멀찍이서 관찰했다. 이 말은, 삭개오가 숨어서 예수를 구경했음을 의미한다. 숨어있는 삭개오, 멀리서 구경꾼이 되어있는 삭개오,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삭개오를 예수께서 먼저 부르셨다. 하나님 나라의 길을 함께 가자고. 숨어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보다는 ‘관객’이 되기를 작심한 삭개오를 불러내셨다. 누가는 삭개오를 부르시는 예수의 초대 말씀이 삭개오처럼 이기적 고립주의의 철탑 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죄책감 속의 모든 인류에게 향하는 예수의 초대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난쟁이는 산꼭대기에서도 키가 작고, 거인은 우물 속에 앉아도 키가 크다”라고 철인 세네카는 말했다. 과거를 숨기며 뽕나무 위에 숨어 서 있던 삭개오는 참으로 부끄러운 난쟁이였으나, 진실을 토하며 예수 앞에 조아린 한 인간 삭개오는 참으로, 상상하기에도 멋진 신앙의 거인이라고 생각한다. 사순절, 예수의 관심은 한 가지 ‘뽕나무에 숨어 있는 인류의 가슴’을 돌이켜 하늘나라 행진에 함께 가자는 부르심일 것이다. 이 부르심에 응답해 뽕나무에서 내려서며, 하늘나라의 길을 함께 가기로 결단하는 해방의 사순절 기간이 되시길 빈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