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박병권] 염치없는 사회

입력 2012-03-05 18:09


염치(廉恥)란 사람 사이의 기본 덕목으로 스스로를 돌아봐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하는 마음 하나 없이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급급한 것을 보고 ‘염치없다’ 또는 ‘몰염치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에는 염치없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뻔뻔스러운 사람이 너무나 많다.

똑 같은 일을 남들이 하면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험한 욕을 퍼부으면서 자신들이 하면 아무 말 없이 합리화하는 비열한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인사원칙을 벗어나 자신의 측근들을 무더기 승진시켜 온갖 비난을 받고 있는 서울시교육감. 재임용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자마자 좌파정당으로 달려간 판사. 현 정부의 인사를 온갖 말로 비꼰 뒤에 정작 대학 후배들을 요직에 배치한 정당대표.

뻔뻔한 지도자 너무 많아

이 뿐 아니다. 최대 규모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다는 점을 내세워 이 당, 저 당을 기웃거리며 의원직을 구걸하는 듯한 노조지도자. 뇌물사건으로 기소되고도 당당하게 공천 받은 야권 인사들. 모두 다 하나같이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반성과 변명도 없이 슬그머니 제몫 챙기기에 나선 군상들이다. 이런 몰염치한 인사들이 총선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의정단상에서 정부관리를 향해 목소리를 높일 것을 생각하니 암연히 수수롭다.

여권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서민을 위한 법안 하나 내지 않고 오로지 지역정서에 편승해 다선중진이 됐으면서도 사퇴는커녕 공천에 안달하며 뒤늦게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인사가 여럿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고려 없이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 보고 달리는 후안무치의 인사들이 판치는 사회는 분명 정상이 아닐 것이다.

고위공직자, 정치지망생 등 사회지도층이나 지도층인사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염치가 특히 요구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들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엄청나기 때문이다. 갑남을녀의 몰염치나 파렴치는 그 자체로 도덕적 비난가능성이 높을 뿐이지만 정치인의 염치없는 행동은 자칫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 서울시교육감의 탐욕은 학생들의 교육을 망치고, 노조지도자의 잘못된 처신은 노동운동 방향을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몰염치한 처신을 하는 인사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언에는 귀를 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큰 소리로 외쳐도 일언반구도 없다. 이런 점에서는 현역의원이면서 이번 총선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여야 의원들이 새삼스럽다. 저마다 사정이야 있겠지만 배지를 달겠다고 아우성인 현장에서 벗어난 모습이 보기 좋다.

성 베드로 성당 안에 있는 르네상스 시대 거장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 상’ 앞에는 언제나 순례객과 여행자가 줄을 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살아 숨쉬는 것 같은 조각상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지은 죄를 회개하고 반성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지나고 생각해보면 후회되는 일이 한둘이 아니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일도 적지 않은 것이 인간의 삶 아닌가.

반성과 회개의 문화 필요

우리 사회의 몰염치가 심한 것은 전통적인 유교문화가 반성의 문화, 회개의 문화로 이어지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불의를 행해도 신이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인의 사고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사단칠정(四端七情) 가운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에서 염치라는 말의 기원을 찾는다면 더욱 회개의 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항상 반성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박병권 논설위원 bk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