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여대생 조카의 ‘주먹’
입력 2012-03-05 18:08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초·중·고를 그곳에서 마친 조카딸은 서툰 우리말 등으로 인해 재수 끝에 한국 최고 명문대학에 진학했다. 국립국제교육원에서 한국어 심화과정을 배울 땐 ‘엽기 한국어’로 우리를 웃기더니 대학 졸업반이 된 지금은 거침없는 한국 사회 풍자로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신입생 때였을 것이다. “작은아빠(억양이 이상하다), 한국에선 왜 여자는 배구하면 안 돼?” 하고 묻는다. “그런 게 어딨어”라고 의아해하자 정황을 얘기했다. 조카는 입학 후 배구동아리에 가입했다. 여자는 자신 한 명뿐. 헌데 선배들이 남자 신입단원은 코트에서 뛰게 하면서 자신만 쏙 빼더라는 것이다. 치어리더나 하라는 권유. 사정사정해 코트에 선 조카. 그리고 대반전. 조카의 스파이크를 막아낼 자가 아무도 없었다. 게임아웃.
이후 조카는 운동에 관한한 ‘전설’이자 ‘여신’이 됐다. 배구 선수 출신도 물론 아니고, 체격 좋고 키가 큰 것도 아니다. 야리야리하다. 집안에 체육인도 없다. 조카 왈, “제가 스포츠를 잘하는 게 아니라 한국 친구들이 너무 못한다니까요. 덩치만 커요. 여자 애들은 아예 안 하고요.” 자신의 운동 실력의 바탕은 학교 체육이 전부라고 했다.
들어보니 그곳은 우리보다 현저히 많은 유럽식 체육시간을 갖고 있었다. 이런 아이가 보름 전 대한민국 정부파견 인턴이 되어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있는 국제기구로 떠났다. 2010년엔 G20 서울정상회의에서 아르헨티나 대표단을 맞아 통역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조카는 떠나기에 앞서 또 한바탕 웃음을 줬다. 학교 동기들이 마련한 환송회식을 끝내고 오락실 펀치머신 앞에서 주먹세기로 내
기를 했다. 명불허전. 남자 동기들 대여섯 명이 ‘설마’ 하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조카 주먹이 가장 셌던 것이다.
‘중학체육수업 확대’ 시행을 둘러싼 논란이 가시지도 않은 채 개학을 맞았다. 정부가 지난달 17일 학교폭력 근절대책의 하나로 이번 학기부터 체육수업을 늘리기로 한 것이 논란의 발단이었다. 급조였고 누가 봐도 관료주의적 탁상행정이었다. “이러다 군부대 입소시키겠다”는 비아냥이 따랐다. 여론 악화로 전면시행, 유보, 자율시행 단계로 봉합된 상태다.
우리 땐 체육을 넘어 교련까지 감내해야 했다.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경우가 흔했다. ‘체력은 국력이다’였다. 그렇다고 그 당시 학교폭력이 없었을까? 체육·교련 교사부터 ‘폭력’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일제강점기 식민 정부는 권력을 빼앗기 위해 개인의 ‘건강’과 ‘위생’을 강조하며 ‘덜 폭력적’ 형태로 우리의 몸을 활용했다. 근대적 규율을 통한 훈육이 목표였다. 근대체육의 태동이기도 했다. 미셸 푸코는 이를 ‘규율의 근대화’라고 했다. 학교 군대 공장 병원 등이 규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근대적 제도다.
이 논리대로라면 교육과학기술부는 ‘규율’을 잡기 위해 체육 확대를 노렸다. ‘권력’ 여부는 모르겠다. 어찌됐든 학생들에게 규율, 즉 ‘순응하는 몸’을 요구했다. 그러잖아도 사회가 다이어트와 성형 같은 산업적 메커니즘 속에 빠뜨려 놓고 몸을 요구하는데 말이다.
교육관료들에게 순수한 교육철학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고 나서 체육시간을 확대해 보라. 건강한 몸에 맑은 정신이 깃들 것이다. 그런 면에서 조카딸은 우리 아이들과 달리 ‘몸의 진정한 주인’이다. 하지만 개강을 앞둔 나의 대학 새내기 딸은 또다른 반전으로 몰아넣는다. “아빠, 코 성형하게 돈 줘!” “네게 들어간 돈이 집 한 채다, 나쁜 놈아.”
전정희 디지털뉴스부 선임기자 jh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