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2) 김재준의 신학
입력 2012-03-04 17:49
칭찬과 비난 동시에 받은 진보신학의 대표
1930년대부터 한국에서의 진보적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장공(長空) 김재준(金在俊, 1901∼1987) 박사였다. 유동식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유형을 설명하면서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박형룡이라면, 진보적 사회참여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은 김재준이라고 말한다. 마치 박형룡이 보수주의 신학계를 대표했듯이 김재준은 진보적 교회를 대표하고 대변했다.
1930년대부터 박형룡과의 대결은 그를 진보적 신학자로서의 뚜렷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마치 칼빈이 그러했듯이 김재준은 가장 큰 칭찬과 가장 큰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김정준(金正俊)은 “김재준이야말로 근본주의 신학의 아성에서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학문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라는 세 가지 무기로써 근본주의 신학이라는 바로의 권력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신학의 길을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보수주의 교계에서는 그를 신신학자, 자유주의자 혹은 파괴적 비평가, 성경의 이적을 불신하는 자, 혹은 교회를 문란케 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김재준과 박형룡의 인간관계, 신학적 견해 차, 그리고 두 사람이 속한 교회조직(치리회)의 역학관계가 향후 한국교회와 신학의 행방을 가름하는 지표였다.
김재준은 1901년 9월 26일(음) 두만강변 산골인 함경북도 경흥군 오아지읍 창동에서 출생했다. 그도 박형룡처럼 유교적 전통교육을 받았다. 그의 나이 20세 때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거하였고, 박형룡과 마찬가지로 김익두 목사에 영적 감화를 받았다. 김재준은 송창근(宋昌根, 1898∼1951)의 안내로 일본 아오야마(靑山學院) 신학원에서 2년간(1926∼1928) 유학하게 되는데 이 때 진보적인 신학을 접하게 된다. 그가 졸업논문으로 ‘바르트의 초월론’을 쓴 것을 보면 자유주의 신학에 도전한 바르트에 흥미를 느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재준은 다시 송창근의 인도로 도미하여 1928년 9월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했다. 이 때 김재준은 아오야마 유학 때와는 달리 보수적인 교수들, 특히 메이첸의 강의와 저술들을 ‘빠짐없이’ 읽었다고 한다. 이곳에서의 기간이 길지 못했으나 그의 신학적 성격을 결정하는데 주효한 시기였다. 김재준은 아오야마학원에서 진보적 신학을 접했으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거부감을 드러냈고, 프린스턴에서는 보수적인 인사들을 접했으나 근본주의 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즉 그는 극단적인 근본주의도, 극단적인 자유주의도 거부했다. 프린스턴에서 1년을 보낸 뒤 1929년 9월 피츠버그의 웨스턴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로 가 구약을 전공하고, ‘오경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이란 논문으로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고 1932년 5월 귀국하였다.
귀국한 그를 남궁혁은 평양신학교 교수로 추천했으나 이미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박형룡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박형룡은 김재준의 신학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재준은 1930년대 자신의 30대 청년기 대부분을 평양 숭인상업학교(1933∼36)와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교(1936∼39) 성경교사로 일했다. 비록 평양신학교 교수는 되지 못했으나 남궁혁의 배려로 ‘신학지남’의 정규 기고자가 되었다. 1933년 ‘욥기에 현한 영혼불멸’(15권3호)을 기고한 이후부터 신학적 문제로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 1935년까지 8편의 논문을 기고했는데, 욥기, 예레미야, 아모스 등에 대한 논문에서 역사비평학을 수용했던 구미학계의 연구경향을 소개했다. 오늘의 관점에서는 문제시 되지 않지만 1930년대 한국교회에서 볼 때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 다른 학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사야 7장14절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오”의 ‘처녀’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알마’를 반드시 동정녀로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여 메시야의 처녀탄생을 불신하는 논문 ‘이사야의 임마누엘예언 연구’(16권1호, 1934)는 심각한 위험으로 간주되었다. 이 글이 김재준과 박형룡 간의 신학적 대립을 야기했고, 두 사람 간의 갈등이 한국교회 신학을 양분하는 경계선이 되었다.
신학지남 편집위원이었던 박형룡은 김재준의 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남궁혁도 김재준의 신학을 우려했다. 결국 김재준은 1935년 5월호를 끝으로 신학지남에 더 이상 기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재준은 1937년 5월 독자적인 잡지 ‘십자군’을 창간했다. 그러나 일제의 규제로 일년도 못돼 폐간되었다가 1950년 속간된다. 김재준은 19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를 통해 자신의 신학을 광포하기 시작한다.
김재준과 박형룡 간의 1930년대의 대립은 시작에 불과했다. 1947년 다시 논쟁하게 되고 그 긴장은 그 이후 계속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박형룡은 보수적 정통주의 신학자로, 김재준은 진보적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확고한 위치에 서게 된다. 김재준과 박형룡의 논쟁은 양자에게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자기 신념의 고정화 혹은 심화(深化)였다. 톨스토이가 비유적으로 말한 바이지만 철은 때리면 때릴수록 단단해지고, 자기주장은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강해진다.
사실 김재준은 ‘파괴적인’ 비평가는 아니었다. 젊은 신학도로서 구미 학계의 연구 경향을 소개했을 뿐이다. 흔히 김재준을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말하지만 그는 19세기 독일에서 발전된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지 않았다. 도리어 신정통주의에 근사했다. 그러나 박형룡과의 대결에서 김재준은 점차 ‘자신의 길’로 더 깊이 빠져들기 시작하였고, 더욱 진보적 신학자로 변모되어 갔다. 이 점은 1930년대 이후의 그의 삶과 학문의 여정 속에 드러나 있다. 김재준이 “정통신학은 신신학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요 정통적 이단이다”라고까지 말한 것은 박형룡에 대한 감정적인 저항이었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