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④ 정치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의 분배… 진은영 시인
입력 2012-03-02 18:05
시가 다시 정치를 사유하고 있다. 2009년 1월 발생한 ‘용산 참사’는 시인들을 다시 정치의 영역으로 호출했다. 문단 내에서 그런 호출을 촉발한 것은 진은영(42·사진) 시인의 산문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 시에 대하여’(계간 ‘창작과 비평’ 2008년 겨울호)였다.
“이주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을 지지하며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거나 지지 방문을 하고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도 시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사회참여와 참여시 사이에서의 분열, 이것은 창작과정에서 늘 나를 괴롭히던 문제이다. 나는 이 난감함이 많은 시인들이 진실된 감정과 자신의 독특한 음조로 새로운 노래를 찾아가려고 할 때 겪는 필연적 과정이라고 믿고 싶다.”(63쪽)
이제 시와 정치가 만나는 지점은 1980년대와는 달라야 한다는 그의 고민은 우리 시대 많은 시인들의 문제의식을 대변한 것이었다. 정치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을 어떻게 분배하고 결합하느냐에 대한 진은영의 고민은 그가 첫 시집을 낸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詩가 다시 정치를 사유하기 시작한 시대
사회참여와 감각 사이의 갈등과 고민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붙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전문)
그는 ‘봄-슬픔-자본주의-문학-시인의 독백-혁명-시’로 이어지는 그만의 단어장을 만들어 놓고 단어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지 않고 분절되지만 그 분절에 감각의 덩어리들이 들러붙어 있다. 각각의 연은 개별적 노래로 들리지만, 연과 연 사이 아득한 공간이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처음 학교에 들어가 단어장을 만드는 학생처럼. 그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정의할까’라는 상념을 집약해 놓고 있다.
진은영은 21세기가 시작되던 2000년 계간 ‘문학과 사회’로 등단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21세기에 태동한 건 아니다. 그는 80년대가 아직 저물기 전에 대학생이 됐다. 그의 시적 기반은 80년대를 막내로서 체험한 사회분위기와 맞물린다. 다만 2000년 이후 등단한 젊은 시인 대부분이 그렇듯, 그 역시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관심을 보여왔다. 이제 그의 시는 ‘무엇’과 ‘어떻게’의 결합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중략)/ 나의 상처들에서”(‘그 머나먼’ 부분)
지금 당장 진은영에게 부담스러운 것은 그 자신이 발표한 산문 하나로 인해 그의 모든 시에서 정치적인 것을 읽어내려는 바깥의 시선일 것이다. 하지만 시는 세계의 완결이 아니라 세계와의 갈등이며 상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믿을 건 다시 감각이라고. 감각적인 것을 그가 어떻게 정치적인 것과 분배해 낼지 궁금하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