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10)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입력 2012-03-01 21:27
마가는 ‘예수 곧 다시 오신다’며 일 않고 기도만 하는 성도들 못마땅
예루살렘에 돌아온 마가는 그 어머니와 외삼촌 바나바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에 대한 이야기와 그 후에 일어난 여러 가지 기적들에 관하여 직접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예루살렘 성도들의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 살펴보았다. 그런 마가가 과연 자기 외삼촌 바나바의 권고를 따라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고 전도 활동에 전념했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외삼촌과 사울과 함께 안디옥에 갔을 때 그가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첫 번째 전도 여행에 나섰을 때에도 큰 문제나 박해가 없었는데도 버가(페르게)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실을 보아도 그렇다. 그렇다면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AD 46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필자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그의 문체로 보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수학적 관용구 즉 ‘Q.E.D.’의 끝맺음으로 보아 그가 수학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추정했었다. 그리고 마가복음의 필체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부잣집 외아들답게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사도행전에 기록된 공동체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
그 삼천이나 되는 사람들의 공동체 생활이 어땠을까?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3)
오순절의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났으나 사도들에 의해 일어나는 기사와 표적은 마가가 돌아와 직접 보았을 때에도 여전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거듭났으면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모두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가와 같은 실리적인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 공동체에는 문제가 있었다. 우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나 그것이 모두 완전한 자유의사로 된 것은 아니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행 2:43)
그 두려움이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에서 나타난다. 아나니아라 하는 자는 그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 그리고 일부만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내놓았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 엎드러져 혼이 떠났고, 다시 그의 아내 삽비라가 들어왔을 때에도 베드로가 땅을 판 값이 이것뿐이냐 물어 그렇다고 하니 그녀 역시 혼이 떠나서 죽은 것이다. 그러자 온 교회와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다 두려워했다. 모든 소유를 서로 통용하는 것은 그것이 온전한 합의로 이루어졌을 때 아름다운 것인데 이미 공동체의 인원은 첫 날만 해도 ‘삼천 명’이었다.
그리고 서로가 그것을 통용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는 말도 그렇다. 교회는 완성된 천국이 아니고 천국으로 가는 과정이며 그 모형일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삼천 명’ 또는 그 이상의 인원이 합의하고 통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 재산을 다 갖다 넣고 시작한 공동체 생활은 매우 위험하고, 잘못된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마찬가지로 그런 증상이 사도행전에도 있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행 6:1)
벌써 이런 통용의 불공평에 대한 불만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당황한 열두 사도는 이 문제를 관리할 인원을 따로 뽑자고 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은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2∼4)
그래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 집사를 뽑았다. 그러나 과연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가 수천 명의 ‘물질적 통용’을 아무런 문제없이 정확하게 해낼 수 있었을까? 통용의 불균형에서 나오는 불만은 비단 헬라파 유대인들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생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고, 의견의 차이도 있을 수 있다. 결국 모든 사람의 불만을 잠재우려다 보면 지출은 필요 이상으로 커진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사역에만 힘쓰겠다고 발을 빼면서 일곱 집사를 세운 것은 어림도 없는 무리였다. 일곱 명이 어떻게 수천 명의 ‘통용’을 관리할 수 있었을 것인가? 나중에 보면 그들 일곱이 전적으로 ‘통용’의 관리에만 매달려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 중 빌립 집사는 오히려 성령이 이끄는 대로 바람처럼 다니며 가사와 사마리아 등지에서 전도 활동에 나섰고, 스데반 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
뿐만 아니라 지출과 수입의 균형도 문제였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사도행전에는 이렇게 소비 생활만 있고, 그들이 어떤 생산적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밭과 소유를 다 팔아 함께 통용했다면 농사를 지을 터전마저 없었을지도 모른다. 수학적이고 실리적인 마가의 눈으로 볼 때 이들의 공동체는 매우 위험한 상태였다. 그리고 실제로 우려했던 일이 생겼다. 마가가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선지자 아가보가 불길한 예언을 한 것이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 11:28)
즉 선지자 아가보가 ‘큰 흉년’이 들 것이라고 예언한 것은 칼리굴라 황제 때였고 실제로 그렇게 된 것은 칼리굴라가 살해당하고 새로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때였다. 그리고 염려했던 대로 예루살렘 교회에는 큰 문제가 생겼다. 생산 활동이나 수입을 늘리는 일은 없고 넉넉하게 ‘통용’만 하던 예루살렘 공동체는 이제 외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을 정도로 가난해진 것이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9∼30)
부잣집 아들이고 실리적인 성품의 마가가 그들을 보았을 때 그 느낌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어머니와 외삼촌 바나바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예수라는 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고, 큰 능력을 보여 주셨고,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보자 그가 수긍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이 보였다. 우선 그들은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신다고 하여 먼 장래를 생각하지 않고 기도와 전도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 6:25)
예수께서 하셨다는 그 말씀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지 일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이 또 문제였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그러나 하나님께서 새들을 기르신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새를 기르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과 새들의 활동을 통해서 기르신다는 뜻이었다. 새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거나 노래만 지저귄다고 해서 그냥 먹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새들에게도 먹이를 찾는 수고는 필요한 것이다. 다만 새들이 열심히 먹이를 찾으면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었다. 마가는 장차 먹을 것을 구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공동체의 위기를 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