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이끌어 낸 시골생활 엿보기… ‘고독의 권유’
입력 2012-03-01 18:11
고독의 권유/장석주/다산책방
장석주(57·사진) 시인은 개에게 시를 읽어주는 사람이다. 왜 하필 개인가. 11년 전 경기도 안성 금광호숫가에 집을 짓고 노모와 더불어 개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
그가 시를 읽어줄 때 개들은 눈을 감고 명상을 한다고 한다. 실은 졸음에 겨워 눈을 감았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노모가 텃밭을 가꾸고 개들이 오수를 즐기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공부다. 연못을 파서 수련을 키우고 토종닭 몇 마리를 키우는 것도 공부다.
‘개’ ‘닭’ ‘노모’에 비하면 형이상학적 층위에서 나오는 ‘내면의 사유’ ‘영혼의 정화’ ‘삶의 완전한 향유’ 따위의 단어들은 그리 절박하지 않다.
오히려 ‘고라니나 뱀들의 동선을 유심히 관찰’하는 게 훨씬 더 살아있는 언어일 수 있다. 그는 2만권의 책을 읽었다.
어떤 측면에서 지식의 과잉은 그가 살고 있는 환경이나 자연에 대해 끊임없이 해석을 해야 한다는 강박의 원천일 것이다. 이런 문장이다. “나는 의식을 압박하는 도시적 삶의 속도에 지쳐 있었고, 비본질적인 것에 너무 많이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살고 있지만 진정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은 매우 괴로운 것이다.”(106쪽)
그는 시골에 살고 있다. 시골은 지식을 갈구하는 곳이 아니다. 시골의 삶은 분주한 삶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의 모체이다. ‘개’와 ‘닭’과 ‘노모’라는 대상보다 훌륭한 책은 없다. 2만권의 책이 무슨 소용이랴. 숲과 나무로 둘러싸인 처소에서 나무를 잘라 만든 책을 읽고 있는 모순이 또 다른 침묵을 낳는다.
그는 말한다. “시골에서의 일상은 느림 그 자체다. 천천히 밥 먹고, 천천히 옷 입고, 천천히 개에게 먹이를 주고, 천천히 산책을 한다. 새로 돋는 잎들 사이로 날카롭게 뻗어오는 빛들을 보는 순간 문득 나는 어떤 고립의 느낌을 강하게 느낀다. 하지만 고립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자에겐 더 이상 고립이 아니다.”(97쪽)
인간의 삶은 어쩌면 너무 단순하다. 산다는 의미를 찾아서 철학과 시와 책에 너무 기댈 필요는 없다. 느림과 고요 그리고 침묵이면 충분하다.
개가 졸면서 명상하듯 사람도 느리게 살며 침묵과 친구하면 된다. 가던 길에서 잠시 멈춰 서 있으면 된다. 우리는 살아있음에서 너무 많은 의미를 찾는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바보인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