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촌은 낙오자의 슬럼 아닌 ‘약속의 땅’… ‘판자촌 일기’

입력 2012-03-01 18:11


판자촌 일기/최협/눈빛

1969년 미국 하버드대 인류학자 브란트 박사는 서울의 판자촌에 대한 탐사에 들어간다. 당시 현장 조교로 탐사에 참여했던 서울대 인류학과 출신의 저자(전남대 인류학과 교수)는 마장동 청계천변 판잣집에 하숙하면서 현지 주민들에게 직접 들은 삶의 애환과 그곳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 생활상 등을 ‘마장동 일기’로 기록해 나간다.

“집주인인 장씨는 전남 나주 사람으로 작년에 서울로 이주해 왔다. 그는 면사무소의 말단 공무원이었는데, 무슨 일로 해직되었고(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음), 그런 연유로 그의 누이와 형제들이 이미 상경해 있던 연고를 좇아 나주의 재산을 처분하여 이주를 감행했다. 서울로 올라온 직후 장씨는 현재의 판잣집을 7만원에 취득하고 곧바로 증축작업에 들어갔다.”(32쪽)

그가 만난 사람들은 같은 집에 세 든 차씨와 안씨, 이웃인 목수 김씨를 비롯해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을 망라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변소였다. 10가구 이상이 오직 하나의 변소를 사용하다 보니 아침마다 변소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특이점은 집 주인 장씨도, 안씨도, 안씨의 매제도, 목수 김씨도, 동네 막걸리집 주인여자도 모두 전라도 사람이라는 점이다. 일지에 따르면 전라도 사람들은 구심점 없이 잘 흩어진다는 통설은 말짱 거짓말이다. 같은 지역 출신 사람들끼리 서로 돕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그가 판자촌에서 발견한 실증적 결과이기도 하다.

“오늘의 좋은 소식은 차씨가 차씨 매제의 말대로 교제비를 8천원 써서 드디어 분뇨수거 트럭의 운전기사로 취직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차씨는 과거에 종로구에서 분뇨수거 트럭의 운전기사 노릇을 한 적이 있기에 이 분야가 생소하지 않다고 한다. 차씨는 오늘은 자신이 잘 방이 없으니 내 방에서 좀 재워달라고 부탁을 했다.”(4월 29일)

‘마장동 일기’는 6월 21일 끝나지만 저자는 20대 후반의 여성으로 알고 있을 뿐 아쉽게도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또 다른 현장조교의 ‘숭인동 일기’를 이어붙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때는 1969년이다. “이 동네에는 미장원이 세 군데 있고 이발소도 세 군데나 있다. 지나다 보면 손님들이 드물게 보이며 이발소보다는 미장원에 손님이 더 많은 것 같다. 오늘은 200미터쯤 떨어진 미장원에 갔는데 마담까지 일하는 사람이 세 명, 모두 서울 사람이 아니었다. 고향은 한 사람은 경북, 두 사람은 전남과 전북이었다.”(4월 10일)

판자촌 주민들은 대부분 열악한 조건의 농촌지역에서 빠져나온 이농민들로, 이주 후에도 실업과 불완전고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돈과 배경이 없고, 배운 것도 없는 이농민들에겐 단시일 내에 사회 상층으로의 진출은 불가능했다. 외양은 슬럼과 마찬가지로 극도로 불결하고 가난해 보이지만, 무능하고 게으르고 더럽고 병들고 범죄에 찌든 인간이 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이들은 놀랄 만큼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이었다.

판자촌은 패배의식과 좌절에 잠식된 낙오자들의 슬럼이 아니었다. 그곳은 농촌사회에서 도시사회로 나아가는 희망과 기대의 관문, 즉 일종의 ‘약속의 땅’과 같은 과도기적 공간이었다. 40년 전 청계천 판자촌 이주민들의 이야기는 현대화에 밀려 황급히 지워진 우리의 과거를 다시 한번 성찰케 한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