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영석] 남북한의 에디피스 콤플렉스

입력 2012-03-01 18:03


“한반도는 초고층 건물을 가장 많이 보유한 지역이 될 것… 자기과시 아닌가”

얼마전 미국 CNN 방송의 여행 사이트가 ‘세계 최악의 건물 톱10’을 발표했다. 첫 번째가 ‘유령의 피라미드’ 건물로 불렸던 북한 평양의 류경호텔이었다. 105층 330m 높이의 이 거대 건물은 1987년에 공사가 시작된 이후 자금난으로 중단되었다가 최근에 가까스로 25년 만에 오픈한다는 소식이다. 그나마도 꼭대기의 레스토랑과 아래층의 객실 일부만 문을 열고 중간층의 대부분은 텅 빈 상태라고 한다. 최근에는 북한의 새 젊은 지도자가 평양에 최고급의 7성급 호텔을 짓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북한의 경제난은 널리 알려져 있다. 평양에 이런 초고층 혹은 호화판 빌딩이 어울리지도 않고 또 필요하지도 않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왜 이런 무모한 건축을 시도하는 것일까? 류경호텔의 경우 그 이유를 알고 보면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남한이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63빌딩을 비롯한 고층빌딩 신축계획을 발표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당시 남한의 최고층 건물인 63빌딩보다 60m가 더 높은 호텔을 짓기로 한 것이 그 계기라는 것이다.

권력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독재자들이 갖고 있는 세계 최초, 혹은 역사상 가장 크고 높은 건물에 대한 집착증은 많은 역사적 사례들이 증명해준다. 영국의 건축비평가인 데얀 수딕은 ‘거대 건축의 욕망’이라는 책에서 ‘에디피스 콤플렉스’라는 말로 권력과 건축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한다. 이런 병리적 집착성은 동서고금은 물론이고 이념적 차이에 상관없이 존재했다.

특히 20세기 초·중반에는 많은 독재자들이 정치적 상징조작의 수단으로 건축물을 활용하였다. 엄청난 규모의 으리으리한 관저나 시설물로 상대방의 기를 제압하기도 하고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절대권력의 이미지를 일반 대중에게 심어주기도 하였다. 1939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하샤 대통령이 히틀러와 회담하기 위하여 베를린의 총통관저에 갔다가 그 규모와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이른바 ‘심리적 무저항상태’의 항복을 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최근 대한민국에도 초고층 건물 신드롬이 불고 있다. 향후 몇 년 내에 100층이 훨씬 넘는 초고층 건물이 서울과 부산에 다수 건축될 것으로 보인다. 조만간 세계에서 단일국가로는 100층이 넘는 초고층 건물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될 것이다. 서울 상암동의 130층 규모의 세계 최고건물을 비롯하여, 서울 잠실의 롯데 슈퍼타워도 123층 건물로 들어설 예정이다. 최근 용산국제업무지구에 계획된 건물은 디자인 모습이 9·11테러 직후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을 연상시킨다 하여 세계적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부산에도 초고층 건물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우리 현실과 여건을 고려해 볼 때 과연 이렇게 많은 초고층 빌딩들이 적절하며 필요한지 꼼꼼히 짚어보아야 한다. 도시가 주는 포근함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압도하는 거칠고 동떨어진 느낌을 줄 위험성 때문이다. 뉴욕 같이 많은 고층건물 지역에서는 도시의 스카이라인과 조화를 잘 이루지만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는 도시의 미관을 오히려 훼손시키고 있다.

국가의 자존심이 될 만한 초고층 빌딩을 지어 국가 상징물로 조성하고, 또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여 경제활동의 중심무대로 삼자는 일부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초고층 건물이 화재, 지진, 바람과 같은 재난에 취약하고 특히 잘못하면 도시공간을 삭막하게 만드는 흉물이 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높이에 집착하기보다는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을 먼저 생각하고 전체 도시모습과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거대 건축의 동기는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 측면 등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근원으로 파헤쳐 들어가면 자기과시를 위한 나르시시즘이 자리 잡고 있다. 북한의 형편에 맞지 않는 과시욕도 문제지만 남쪽의 졸부근성적 과시욕도 경계해야 한다. 도시는 특정 자본이나 권력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김영석 연세대 교수 언론홍보영상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