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진홍] ‘13억 돈 상자’ 사건을 보며
입력 2012-03-01 17:55
“(권양숙 여사가 돈 받은 사실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박연차 태광그룹 회장의 말이 진실이라고 뒷받침할 증거를 검찰이 갖고 있지 않았다.”
“증거도 없이 어떻게 전직 대통령을 소환 조사할 수 있겠느냐. 무수한 증거들이 수사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숨진 지 2년여가 흐른 지난해 6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노 전 대통령 수사를 지휘했던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 간에 오간 공방이다. 문 이사장이 자신의 책을 통해 주장한 내용을 이 전 중수부장이 반박하면서 잠시 소동이 벌어졌었다. 두 사람 간 쟁점은 권 여사의 검은돈 수수를 노 전 대통령이 인지하고 있었느냐 여부에 맞춰져 있다. 결코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만큼 그다지 생산적 논쟁은 아니다.
이 논란으로 가려져선 안 될 일이 있다. 노 전 대통령 가족들이 받았다는 640만 달러에 관한 부분이다. 노 전 대통령 사망 직후 검찰이 수사 종결을 선언하고 모든 수사 내용과 증거들을 역사에 묻어버려 미제로 남아 있다.
민주당과 달리 조용한 정연씨
최근 이와 관련된 듯한 문제가 정치쟁점으로 등장했다. 보수성향의 한 시민단체 고발로 검찰이 수사 중인 이른바 ‘13억 돈 상자 의혹’ 사건이다. 요지는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가 2009년 1월 13억원을 100만 달러로 환전해 환치기 수법으로 밀반출했다는 것이다. 용도는 미국 뉴저지 주 웨스트뉴욕의 고급 빌라인 허드슨클럽 매입 잔금으로 알려져 있다. 밀반출된 돈이 이 빌라 주인 경모씨에게 전달됐다는 환치기 가담 인물들의 진술이 나왔다. 13억원 중 일부가 든 상자 3개 사진, 정연씨와 경씨가 사인한 빌라 거래 이면계약서도 공개됐다.
경씨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실체적 진실이 규명된 건 아니다. 밀반출했다는 시점이 검찰 수사가 한창이던 때여서 밀반출이 가능했겠는가라는 지적 등 석연찮은 구석도 없지 않다. 하지만 진술과 증거들이 너무 구체적이다. 환치기는 노 전 대통령 수사 때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검찰 수사는 불가피해 보인다.
정치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친노(親盧)가 장악한 민주통합당이 발끈한 탓이다. 지도부가 총출동해 총선을 40여일 앞둔 검찰 수사는 비열한 선거개입이며, 느닷없는 수사는 인면수심의 작태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공세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정연씨의 밀반출 의혹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는 점, 새누리당 일각에서 요구하는 노 전 대통령 수사기록 공개에 묵묵부답인 점 등이 그것이다.
내려놓을 게 있으면 내려놔야
민주당과 대조적으로 정작 정연씨는 조용하다. 아무 반응이 없다. 노 전 대통령 가족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아마도 ‘어떡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을 것 같다. 지금, 정연씨를 비롯한 노 전 대통령 가족들이 바라봐야 할 대상은 민주당도, 검찰도 아니다. 그 어떤 가치보다 도덕성을 중시해온 노 전 대통령을 바라봐야 한다. 그러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정답을 구할 수 있을 듯싶다.
노 전 대통령이 숨진 지 한 달도 안 돼 이 난에 ‘떳떳하지 못한 돈 정리할 차례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은 적이 있다. 부담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노 전 대통령 유족들에게 고인과 국민을 위해 부정한 돈이 있다면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정리를 마쳤다면 요즘처럼 다시 수모를 겪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이런 말을 하는 게 여전히 조심스러우나, 더 추해지기 전에 내려놓을 게 있다면 빨리 내려놓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