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현동] 탈북자와 박선영 의원

입력 2012-02-29 22:45


“탈북자 인권을 애써 외면해온 정부, 정치권, 진보단체 모두 비겁자다”

나는 박선영 의원을 잘 모른다. 그가 어떤 이력을 가졌고, 어떤 생각과 정치철학을 가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의정활동을 했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그렇고 그런 국회의원의 한사람으로 생각했다. 그에게 정치후원금을 기탁해본 적도 없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소속인 박 의원이 지난 25일 눈물을 흘렸다. 그는 “중국 내 탈북자들의 생명과 안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보장되고…”라고 호소했다. 감정에 복받치는 듯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눈물과 흐느낌은 가냘픈 목소리를 더 애처롭게 했다. 그러나 강했다.

쉰을 훌쩍 넘겨 희끗희끗한 머리칼, 핏기 없는 얼굴, 눈동자에 그렁그렁 맺혔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낯이 뜨거워졌다. 나는 탈북자를 위해 뭘 했으며 관심이라도 가졌던가?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 눈물의 의미를 모두 새기진 못한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 때 그 눈물엔 절박감이 느껴졌다. 진정성도 배어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이 보여준 눈물과는 분명 달랐다.

정치인에게 눈물은 때론 무기가 된다. 눈물은 비논리적이지만 논리보다 강하다. 정치인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눈물은 종종 유효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으나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결백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을 많이 봤다. 얼마 전에도 어느 여성 정치인은 공천결과에 반발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같은 눈물이 아니다. 남을 위한 눈물과 나를 위한 눈물은 분명 다르다. 눈물 뒤에 숨겨진 가식과 허위를 깨달았을 땐 이미 늦다.

박 의원은 지금 탈북자 북송 중단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이다. 벌써 아흐레째다. 현재 그는 생수와 약간의 소금으로 힘들게 버텨가고 있다.

어제 박 의원이 농성중인 0.5평 남짓한 텐트를 찾아가봤다. 누군가 박 의원 손을 잡고 짧은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붉은 장미를 든 노신사도 있었고, 파란 눈의 외국인도 보였다. “중국이 변하든지, 내가 끝나든지…” 목숨을 담보한 듯 단호했다. 그가 탈북자 인권에 관심을 가진 특별한 이유는 없다. 대학에서 ‘헌법선생’을 했고, 헌법의 기본정신이 인권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힘 없었지만 메시지는 강력했다.

누가 박 의원을 0.5평 텐트로 내몰았는가. 중국뿐일까? 단언하건대 아니다. 정치권은 탈북자 문제를 애써 외면해왔다. 관련법이 국회에 수차례 상정됐지만 그때마다 자동 폐기됐다. ‘조용한 외교’로 일관해온 정부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인권의 가치에 촛불을 들었던 진보단체들의 침묵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정치와 이념에 매몰된 탓이다.

다행인 것은 박 의원의 문제 제기 이후 세계 유력 언론들이 북한의 인권실태와 중국의 반인권적 처사를 이슈화하고 있다. 정부도 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지난 2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거론했다. 같은 날 국회도 북한이탈주민 강제 북송중단 촉구 결의안을 의결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잘한 일이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치적으로 득이 된다는 계산을 했는지 모르겠다.

인권은 보편적 가치다. 살인범에게도 인권이 있다. 권력이 없다고, 피부색깔이 다르다고, 종교가 다르다고 인권의 가치가 훼손돼선 안 된다.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누구나 인권을 부여받는다. 망자(亡者)의 인권도 침해받아선 안 된다는 게 헌법정신이다.

북한은 우리에게 이중적 존재다. 동포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 도와야 할 대상이고,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적이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일으켜 국민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걸핏하면 ‘불바다’ 운운하며 위협한다. 그렇더라도 인권은 존재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북한 주민을 동포로 생각한다면, 진정으로 통일을 원하고 언젠가 함께 살아야 할 형제자매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비겁자가 돼선 안 된다.

박현동 편집국 부국장 hd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