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사순절을 맞으며

입력 2012-02-27 21:20


잘 알려진 동양의 우화 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만을 기다리던 어느 사형수가 간수의 소홀함을 틈타 감옥을 탈출해 나왔다. 불행하게도 감옥 밖은 정글 지대라서 사나운 사자에게 쫓기게 되었다. 사형수는 급한 김에 물이 말라버린 우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그 우물 속에는 독사 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 불행한 사형수는 우물 밖에 나가 배고픈 사자의 먹이가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물 밑으로 내려가 독사들의 밥이 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우물 속 중간쯤의 틈바구니에 난 나뭇가지를 붙들고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 검고 흰 쥐 두 마리가 살금살금 기어 나와 그가 매달린 나뭇가지 주위를 잘근잘근 쏠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나뭇가지는 부러져 그는 독사들의 입으로 떨어져 버릴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 사형수는 자기의 마지막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올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거기 매달려 있는 사이 자기 주위를 돌아보고 자신이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의 잎에 꿀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 혀끝으로 전해오는 감미로운 꿀맛에 차츰 자신이 처한 ‘냉정한 현실’을 잊고 말았다.

인생이란 외줄 가지를 붙들고 밤과 낮의 무심한 세월이 그 가지를 갉아먹는데 꿀맛이란 환상 속에서 사나운 사자와 독사의 입이 기다리는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 싶은 것이 우리가 사는 삶이라는 통찰을 담은 이야기다. 때론 우리가 감미로운 꿀맛 속에 인생이란 ‘한여름 밤의 꿈’에 취해 고난의 자리를 피해보려 해도 밤과 낮의 세월이 우리의 외줄 가지를 갉아먹는 그 ‘천둥소리’를 막을 자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다시 사순절을 맞는다. 사순절은 예수의 부활 사건 이전 40일간의 고뇌에 찬 삶을 기리는 교회의 절기다. 사순절의 예수는 자신의 삶의 절정의 순간에서도 ‘생의 비극 의식’을 잃지 않으신 분이며 그의 죽음의 길, 그 비극의 복판에서 오히려 ‘환히 깨어 있는 삶의 연속성’을 지키신 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항상 괄호 밖의 생을 사셨다.

우리네 평범한 인간들의 생은 항상 괄호 속에 닫힌 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들의 감정, 우리들의 편견, 우리들의 지식, 우리들의 경험이라는 우물 속 괄호 안에 갇혀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닫힌 삶을 사는 것이 일상적인 우리의 삶이다. 어느 때 한순간 놀라운 통찰이 우리를 흔들고 지나가 우리들의 우물 속의 삶, 닫힌 삶을 깨우쳐 주고 생과 사를 초월하는 자유의 삶으로 우리를 불러낸다 할지라도, 그 순간이 지나면 곧 우리는 다시금 새로운 대괄호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음을 발견한다. 아니 우리 스스로 괄호 안에 갇힌 삶에 더 만족해하는지 모른다. 때문에 사순절의 예수는 괄호 안에 갇힌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어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기념하며 묵상하는 사순절을 맞아 우리가 진정으로 울어야 할 것은 우리들의 닫힌 삶을 위해서 일 것이다. 우리가 울어야 할 것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 예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느새 눈물을 잊어버린, 우리의 메마른 삶을 위해서다. 눈물만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비극적 운명을 어느새 감각적 기쁨이 주는 대괄호에 사로 잡혀 망각한, 슬픈 우리의 인생을 위해 울어야 할 것이다. 잃어버린 삶의 순수성을 위해, 잃어버린 사랑을 위해, 이 사순절의 기간에 울 수 있는 자는 복된 자라 말할 수 있겠다.

이 사순절에 정직한 혼의 소리로 부르짖으며 울 수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눈물이 메마른 시대, 그리하여 시도 때도 없이 춤추고 노래하고 행복을 가장해야 하는 시대. 이 시대에 울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이웃과의 관계를 위해 나 자신을 위해, 그 깨어지고 상처입고 금이 간 인생의 조각난 희망과 꿈들을 붙잡고 우는 사순절이 되시기 바란다. 우리들의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