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 파일] 근거중심의학
입력 2012-02-27 18:53
임상시험은 인류 건강에 이바지할 신약을 개발했을 때 그 약을 사람들이 실제 사용하면 얼마나 좋은지, 어떤 부작용이 나타나는지를 검증하는 절차다. 물론 ‘신약이니까 시험 삼아 써 보라’ 한다고 무턱대고 응할 사람은 없다. 즉 잠재적 피험자들은 그 약이 안전한지,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참여 여부를 고려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임상시험은 단계적으로 시행된다.
임상시험에는 동물 실험을 통해 약의 독성과 부작용을 테스트하는 전임상(前臨床) 단계, 최소 용량을 가지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약물의 대사, 해독 과정(안전성)을 검사하는 제1상, 좀 더 많은 수의 환자들에게 적용해 보고 실제 효과(유효성)를 확인하는 제2상, 마지막으로 안전하고 유효한 최적의 용량과 제형을 결정하는 제3상이 있다.
근거중심의학(EBM)은 새로운 약이나 치료법을 일반인에게 적용할 때 이와 같은 임상시험 결과를 근거로 삼아 임상 의사들이 진료 현장에서 과학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학문이다.
따라서 근거중심의학에서는 단순히 임상시험을 했는지 여부만을 따지지 않는다. 임상시험 수행 과정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결과는 믿을만한 것인지를 검증한다. 즉 과학적 방법의 임상시험이라도 시험 디자인이나 방법에 따라 실제 약효가 왜곡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임상시험의 최종 결과뿐 아니라 진행과정까지도 세세히 확인한다는 얘기다.
정보기술(IT) 강국인 우리나라에는 특히 입소문으로 유행하는 치료법이 많다. 딱히 큰 병도 아니어서 병원을 찾기는 번거롭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걱정이 되는 피부나 미용에 관련된 정보들은 순식간에 전국에 퍼지기 일쑤이다.
이 경우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과 함께 ‘해도 괜찮은 건가?’ 하는 걱정이 동시에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근거중심의학이다. 그 치료법의 효과와 안전성이 과학적으로 검증이 됐는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때 각광받던 태반 주사에 대한 근거중심의학적 평가가 내려진 적이 있다. 평가를 내린 주체는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태반 주사의 허가사항인 갱년기 장애, 만성 간 질환에 대한 효과는 기존의 다른 치료법에 비해 더 낫다는 근거가 없었고 피부미용, 항(抗)노화, 피로회복 등 비(非)허가사항에 대한 효과 역시 근거가 미약하거나 아예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과학적 근거가 없는 치료법이라 하더라도 환자 본인이 굳이 선택하고 싶다는 것까지 말리긴 어렵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는 새로 등장한 치료법이 효과와 안전성이 있는 것인지를 궁금해 하고 그 근거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국민보건 향상과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막기 위해 근거중심의학이 한층 더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이유다.
주웅 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