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팔순 ‘뜨거운 현역’ 우리 봄날, 끝나지 않았다… 잇따라 막 오르는 노장들의 무대

입력 2012-02-26 17:22


‘노병은 죽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연극계 70대 이상 배우들의 무대가 잇따라 열려 화제가 되고 있다. 현역 최고령 여배우인 백성희(87)와 20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박근형(72)이 호흡을 맞추는 ‘3월의 눈’, 병마를 이겨내고 다시 무대에 오른 오현경(76)의 ‘봄날’, 식지 않는 열정으로 ‘영원한 청춘’을 과시하는 이순재(77)와 전무송(71)의 ‘아버지’ 등이 관객들을 손짓한다.

‘3월의 눈’(연출 손진책)은 지난해 국립극단 두 원로 배우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 극장이 서울 용산 서계동에 문을 열면서 헌정공연으로 마련된 작품. 노부부의 잔잔한 대화로 세월의 애잔함을 풀어내는 ‘3월의 눈’은 다음 달 3일부터 18일까지 같은 극장에서 세 번째 공연을 올린다. 그동안 백성희와 장민호(88)가 부부로 나왔으나 최근 건강이 좋지 않은 장민호 대신 박근형이 투입됐다.

박근형이 연극 무대에 서는 것은 1992년 ‘두 남자 두 여자’ 이후 20년 만이다. 연습에 한창인 그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연극은 항상 마음속에 있었지만 한 번 연극계를 나와 다른 일을 하다 보면 돌아오는 게 어렵다”며 “시기적으로 안 맞을 때도 있었고 여러 형편이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번 출연은 그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백성희의 전화 한 통으로 이뤄졌다.

박근형은 “가장 존경하는 백성희 어머니와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며 “어머니가 전화 주셔서 하겠느냐고 하시길래 ‘하겠습니다’라고 대뜸 대답했다”고 소개했다. 이에 백성희는 “50년 전에는 키가 크고 깡 말라 구부정했는데 많은 작품을 함께 하면서 가까워졌다”고 화답했다. 15세 차이인 두 배우는 “눈빛만 봐도 서로를 알기 때문에 부부 연기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극단 백수광부의 ‘봄날’(연출 이성열)은 다음 달 16일부터 4월 1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된다. 노욕에 사로잡힌 아비와 일곱 아들이 빚는 갈등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고통과 욕망을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무대 언어로 풀어낸 작품이다. 아버지 역에는 1994년 식도암과 2007년 위암에 이어 교통사고까지 겹치는 불운을 딛고 2009년 공연 때 무대에 오른 오현경이 다시 맡았다.

1984년 초연된 ‘봄날’은 2009년 공연 당시 전회 매진을 기록하면서 서울연극제 연출상(이성열)과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대상(오현경)을 받았고, 연극평론가협회가 뽑은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에 꼽혔다. 지난해 극단 백수광부 15주년 기념작으로 공연했고 올해는 명동예술극장 공동제작 공모 선정작으로 뽑혔다. 초연 때도 아버지 역을 맡은 오현경은 이번까지 네 번째 무대에 오른다.

무대는 봄날 타오르는 산불처럼 반역을 꾀하는 아들과 하루하루를 참회하듯 살아가는 아버지의 삶이 시끄럽지 않으면서도 해학적으로 그려진다. 유연한 화술의 연기자인 오현경은 “아직까지 발성에는 크게 문제가 없지만 힘닿는 데까지 무대에 오르고 싶다”고 전했다. 아버지와 갈등하기도 하고 껴안기도 하는 큰아들 역에는 연기력 뛰어난 이대현이 맡았다.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연출하는 ‘아버지’는 미국 현대 연극의 교과서로 꼽히는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원작이다. 1940년대 미국 자본주의 사회 세일즈맨의 비극을 2012년 현재 한국의 아버지 이야기로 각색했다. 원작의 윌리에 해당하는 아버지 장재민 역에 이순재와 전무송이 더블 캐스팅됐다. 이순재는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를 두 번, 전무송은 네 번 연기한 바 있다.

최근 제작발표회에서 이순재는 “1978년 처음엔 ‘달이 아파트 사이로 가고 있구먼’이라는 표현이 그냥 흘러가는 대사인 줄 알았다. 2000년에야 콘크리트로 덮여가는 도시화에 대한 경고라는 것을 알았다. 명작은 할 때마다 새로운 테마가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무송은 “지금까지는 우리 아버지를 생각하며 무대에 올랐고, 이번에는 아버지로서 자식을 생각하면서 만들어볼까 한다”고 밝혔다.

웃음과 눈물 연기에 관록이 붙은 두 배우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자식에게서도 버림받지만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가슴 뭉클하게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버지’는 4월 6∼7일 부산 해운대 영화의전당 하늘연 극장에서 공연된 뒤 같은 달 13∼29일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무대에서 선보인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