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51) 박형룡과 정통주의 신학
입력 2012-02-26 18:26
50년간 한국교회·신학의 중심에서 활동
앞에서 언급했지만 1930년대에는 한국인에 의한 신학논구가 시작되고, 한국인에 의한 신학저술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박형룡 박사였다. 그는 1927년의 남궁혁(南宮爀), 1928년의 이성휘(李聖輝)에 이어 1931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수로 활동하는데, 이때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보수적 정통주의 신학을 고수하고 계승하는 신학자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죽산(竹山)이라는 호로 불린 박형룡(朴亨龍, 1897∼1978)는 한국교회가 낳은 대표적인 신학자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는 1930년대 초부터 1970년대까지 약 50년간 한국교회와 신학의 중심에서 활동해 왔다. 그의 가르침과 유산은 오늘의 한국교회 역사와 신학, 교회적 삶의 행로에 영향을 끼쳐왔다. 따라서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가 오늘의 한국교회 신학을 주형해 왔다는 점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박형룡은 1897년 3월 28일(음력) 압록강변 평안북도 벽동에서 출생했다. 그의 이름 형(亨) 룡(龍)을 보면 그의 가계는 기독교 전통과는 거리가 있었음을 직감하게 된다. 박형룡이 태어난 이듬해는 송창근(1898∼1952)이, 1901년에는 신학적 견해를 달리했던 김재준(1901∼1987), 김교신(1901∼1945), 이용도(1901∼1933), 함석헌(1901∼1989)이 출생했고, 1902년에는 한경직(1902∼2000)이 출생했다.
박형룡은 당시 관행에 따라 유교식 서당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으나,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입신한 후, 벽동교회에서 최봉석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선천의 신성중학교(1914∼6), 평양의 숭실전문학교(1916∼20), 남경(南京)의 금능대학(1921∼23)을 거쳐 프린스턴신학교(1923∼26)에서 3년간 수학하고 신학사(Th. B)와 신학석사(Th. M) 학위를 받았다. 이곳에서 박형룡은 기독교신앙을 체계화된 학문적 이론으로 정립하게 된다. 프린스턴에서 찰스 하지, 워필드, 윌슨 등의 영향을 받지만 특히 메이첸(G. Machen, 1881∼1937)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 후에는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교신학교에서 9개월 간(1926.9∼1927. 7) 변증학을 공부하고 1927년 7월 귀국하였다. 1933년에는 ‘자연신학으로부터의 반기독교적 추론’(Anti-Christian Inferences from Natural Science)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Ph.D)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박형룡은 평양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일하는 한편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31년 4월부터 장로회신학교 전임교수가 된다. 그는 이때부터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는 1938년 1학기까지 교수로 사역했다. 1942년에는 만주 동북신학원 교수 및 교장으로, 1947년에는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1948년에는 남산의 장로교신학교 교장으로, 1952년 이래로는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1972년까지 활동하고 은퇴했다. 즉 그는 1931년부터 1972년까지 약 40년간 한국과 만주에서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로 활동하게 된다.
한국교회사에서 박형룡의 존재와 의의를 보여주는 최초의 경우가 1930년대 초 장로교 총회에서 제기 됐던 신학논쟁이었다. 1920년대까지의 선교사 중심의 보수주의와는 달리 1930년대 초부터 진보적 신학이 대두하였는데, 그 첫 변화가 성경관의 변화였다. 완전 영감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성경 비평학이 도입되었다. 모세의 창세기 기록설이 부인되었고(1934), 고린도전서 14장 33∼34절 해석과 관련하여 여권(女權) 문제가 제기되었다.
또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사건(1935)을 중심으로 신학적 견해차가 분명하게 노정되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장로교 총회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선교사 라부열(R. L. Robert)이 위원장, 박형룡은 서기였다. 비록 박형룡은 서기였으나 조사위원회의 활동은 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때로부터 박형룡은 신학적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총회에서 채택된 조사위원회의 보고는 박형룡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었는데, 이것은 한국장로교회에서 박형룡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 박형룡은 192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자유주의-근본주의’ 논쟁에서 메이첸의 경우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박형룡에게는 변증과 옹호가 중요한 사상적 맥이었고, ‘기독교 근대 신학 난제 선평’에서 말한바와 같이 ‘신학사상의 바른 자와 그른 자를 획별차천명(劃別且闡明)’하는 것을 교회를 위한 사명으로 이해했다.
박형룡은 자신을 ‘근본주의자’라고 했는데, 역사적으로 근본주의는 1920년대 미국교회에서 현대주의자들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그래서 근본주의는 성경의 축자영감과 무오성을 골자로 하는 정통적 기독교 교리를 옹호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는 보수신학을 의미했는데, 이것이 박형룡이 이해하는 근본주의였다. 박형룡이 이해한 근본주의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신앙이자 정통주의 기독교운동이었다.
그는 근본주의는 20세기 미국적 배경에서 대두된 신학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신앙이며, 초대교회 교부들과,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파수하려했던 신학이었다고 인식하였다. 그가 말하는 근본주의는 정통신학과 동일한 의미였고, 그 신학은 구주대륙에서 발전된 칼뱅의 개혁주의 신학에 영미의 청교도적 특징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서에 나타난 신학이었다. 그가 이해한 근본주의는 개혁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이를 박형룡은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고 불렀다. 그에게는 일반은총에 대한 이해와 문화 변혁적 인식이 다소 부족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의 신학적 성격은 후에 논할 김재준(金在俊)과의 논쟁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고신대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