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얼굴을 보이라
입력 2012-02-26 17:50
마태복음 15장 22∼28절
‘얼굴’이란 말은 흔히 인체의 한 부분인 얼굴을 가리키기보다 전인으로서의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얼굴 좀 봅시다”하는 말은 성형외과 의사가 진료를 할 때 하는 말이 아닌 “한 번 만납시다”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려 함이라”(살전 3:10)하고 말했으며, 본문 말씀에 기록된 가나안 여성은 자신의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서 얼굴을 들고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처음에는 그 여자의 간청을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고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는 말씀으로 거절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굴하지 아니하고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서 절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하고 다시 간청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 하니라”는 모욕적인 말씀으로 다시 거절했으나 그 여성이 포기하지 않고 “주여 옳습니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하며 다시 간청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시며 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가 주님 앞으로 당당하게 나와서 간청한 용기와 포기할 줄 모르는 적극적인 태도에 감동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병을 고치든 은혜를 받든 도움을 구하려면 이 가나안 여성처럼 “얼굴을 들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직고해야 할 것입니다. 얼굴을 보인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깊은 뜻은 첫째, 정정당당하다는 의미입니다. 거리낌이 없는 사람만이 당당하게 얼굴을 들고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강도나 절도, 또는 인질범 등 옳지 못한 일을 계획하는 사람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을 감추기 마련입니다. 둘째로 얼굴을 보인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선생이나 목사는 강의실이나 교회에서 앞자리에 앉는 사람을 존중하며, 그런 학생이나 신자에게 일을 맡기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앞자리를 선택하는 사람은 대게 떳떳하고 매사에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자리 성도를 기억하시고 그들의 찬송과 기도는 음성만 듣고도 누구의 기도이며 누구의 찬송인지 아실 것입니다. 앞자리를 비워놓고 뒷자리만 찾는 사람, 앞의 사람의 어깨 뒤에 자기 얼굴을 숨기고 앉는 사람은 ‘앞자리 형’으로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하나님을 만나기 쉬울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하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나 사양하는 사람, 또는 도망치는 사람을 불러서 상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처럼 적극적으로 나가는 사람에게 칭찬하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우리의 음성, 우리의 연주,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은혜와 복을 주시는 통로를 여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 귀신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이 가나안 여성의 믿음과 태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도한호 목사 침신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