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③ 세계의 경계로 확대되는 모성성… 시인 허수경
입력 2012-02-24 17:55
최근 한국문학에 ‘글로컬(glocal)’이 새로운 지향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global)와 지역(local)의 합성을 추구하는 실험이다. 하지만 세계와 지역 사이의 대립된 것을 해체하면서 연대를 모색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어찌 보면 올해로 독일 거주 20년, 유적 발굴 20년의 고독을 모래처럼 씹으며 살아온 시인 허수경(48·사진)에게만 이 실험은 가당한 것으로 열려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묻는다, 너는 누구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너는 누구인가 너는 산청역의 코스모스 너는 바빌론의 커다란 성 앞에서 예멘에서 온 향을 팔던 외눈박이 할배 너는 중세의 젖국을 파는 소래포구였고 너는 말을 몰면서 아이를 유괴하던 마왕이었고 너는 오목눈이였고 너는 근대 식민지의 섬에서 이제 막 산체스라는 이름을 받던 잉카의 한 아이였고 너는 인사동 골목의 식당에서 연탄불에 구워져 나오던 황태였고 너는 나에게 멸치를 국제우편 소포로 보내주던 현숙이었지”(‘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부분)
폐허의 유적지에서 본 삶과 죽음의 기원
외방서 겪는 고통과 슬픔, 감격의 언어들
허수경이 태어나고 자란 경남 진주에 산청이며 소래포구이며 인사동이며 바빌론과 예멘과 산체스가 겹쳐지고 있다. ‘내가 들어올 때 나가는 너’, ‘내가 태어날 때 죽은 너’는 도처에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너는 누구인가’. 허수경은 일 년의 절반 이상을 이집트와 시리아와 이라크로 떠돌며 살아왔다. 폐허의 유적지에서 그가 거의 매일 발굴한 것은 삶과 죽음의 기원일 터이다.
모래 도시들의 건조한 공기를 폐부로 들이마시며 모국어에 대한 향수로 입술은 갈라지고 신열을 앓던 그만이 ‘내가 태어날 때 죽은 너’라고 쓸 수 있는 자격이 있을 것이다. 그 자그마한 몸으로 체험한 노마드적 삶의 일상화는 ‘너’와 ‘나’의 교차적 호명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묶어버린다. 과거의 진주 처녀가 이제 세계 시민이 돼 있는 것이다. 모래 속에서 발굴한 유골의 없어진 입을 대신해 그는 자신의 입을 달아주며 이렇게 자답하고 있다. 시는 이어진다.
“나는 전철문을 나서면서 대답한다 나는 고대 왕무덤에서 나온 토기였다가 그 토기의 입이었다가 텅 빈 세월이었다가 구겨진 음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창녀의 방 창문에 걸린 커튼이었지 은행 금고 안에 든 전쟁이었다가 아프가니스탄 고원에 핀 양귀비였다가 나는 실향민 수용소의 식당에서 공급해주던 수프였다가 (중략) 저 멀리 용산 참사의 시체가 떠내려가던 어떤 밤에 아무런 대항할 말을 찾지 못해서 울던 소경이었어”
허수경은 한국과 독일, 그리고 옛 페르시아를 지칭하는 근동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 넘나듦 속에서 모국어인 한국어에 독일어와 ‘쐐기문자’로 상징되는 고대 근동어가 끊임없이 틈입하는 혼종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즘 고고학은 왕들의 금테 두른 유적보다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토기의 파편, 말하자면 이름 없이 사라져간 이들의 역사를 발굴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한다. 이에 비춰, 허수경은 모래 속에 파묻힌 폐허의 흔적에 귀와 입을 내주며 공명하고 있는 것이다.
혼종의 언어는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비록 한국어로 말하고 있지만 ‘너의 말’과 ‘나의 말’이 서로를 밀어내고 또 뒤섞이는 이항대립의 뒤척임을 이명처럼 들으며 영혼의 목소리로 변주해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경남 진주와 이라크와 시리아와 이집트의 폐허 도시를 잇대는 혼종의 연대는 그가 외방(外方)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과 슬픔과 환희와 감격을 질료화해 재구축되고 있다.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