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염성덕] 新보릿고개

입력 2012-02-24 17:53

보릿고개는 묵은 곡식이 거의 떨어졌는데도 보리가 여물지 않아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기간을 이르는 말이다. 동의어로는 맥령(麥嶺) 춘황(春荒) 등이 있다. 춘궁기(春窮期) 궁절(窮節) 궁춘(窮春) 감잣고개도 비슷한 뜻이다. 추수하기 전, 피도 패지 않을 무렵에 농가의 식량 사정이 어려운 때를 뜻하는 피고개도 있지만 보릿고개가 훨씬 견디기 힘든 기간이었다.

고대로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굶주림에 대한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정약용은 기아시(飢餓詩)를 지어 보릿고개의 곤궁함을 널리 알렸다. 일제 강점기에는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겨 보릿고개가 구조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초근목피로 연명해 부황증(浮黃症)에 걸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국인이 보릿고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후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된 이후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보릿고개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에도 종종 등장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개성의 한 거상 일가의 삶을 그린 박완서의 장편소설 ‘미망’과 채만식의 자전적 중편소설 ‘민족의죄인’이 꼽힌다. “죽자구나 농사지어도 보릿고개엔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소작인 팔자가 피어 봤댔자 얼마나 피겠다고….”(미망) “4월이면 여느 때에도 춘궁이니 보릿고개니 하여 넘기가 어려운 고비인데….”(민족의죄인)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 ‘보릿고개에 죽는다’는 속담에는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60년대 후반에 사라진 보릿고개가 재현될 조짐이다. 이른바 ‘연금 보릿고개’로 통하는 신보릿고개다. 은퇴하고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 소득이 없는 기간이 이에 해당한다. 국민연금은 출생연도에 따라 첫 수령 연령이 60세부터 65세까지 차이 난다. 조기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지만 수령액이 팍 줄어든다. 그나마 베이비부머 가운데 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33.8%에 불과하다.

직장인의 평균 정년이 55세임을 감안하면 적게는 5년에서 많게는 10년까지 노령연금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1년에 두어 달가량 찾아오는 보릿고개보다 은퇴 후 사망할 때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신보릿고개의 참상이 심각할 수 있다. 은퇴 설계는 최대한 빨리하고, 다양한 자구책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