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9) 칼리굴라가 본 십자가

입력 2012-02-23 18:22


카이우스 살해 당한 뒤 아그립바 Ⅰ세, 유대인 환대-그리스도인은 박대

카이우스 황제의 근위대 지휘관 케레아 카시우스는 황제의 변덕스러운 명령을 수행하는 일에 지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업무도 아닌 징세 장려 활동까지 하고 조세 감면을 요구하는 시위자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한 원로원 의원을 처벌하기 위해 황제의 지시에 따라 그의 연인을 고문해야만 했다. 그는 더 이상 미치광이 같은 황제의 욕설을 들어가며 그를 떠받들고 모시기가 싫어졌다. 그는 군단 사령관 코넬리우스 사비누스와 황제의 매부인 미누키아누스 등 동지를 규합하여 황제 암살을 계획하고 거사에 유리한 시기를 찾고 있었다.

“그날의 암호는 자유(Libertas)였다.”(유대고대사 19-2)

마침내 그 날이 왔다. AD 41년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를 기념하는 공연이 황궁의 극장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셋째 날을 거사일로 잡은 것이다. 연극장에는 공연을 보러 온 인파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황제가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 대한 제사 의식을 끝내고 착석하자 공연이 시작되었다. 공연 중에는 체포된 강도단의 두목이 십자가에 달리는 장면이 있어 무대에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황제가 지루한 눈치를 보이자 미누키아누스가 자리를 뜬 케레아에게 이를 알리려고 일어서려고 했다.

“어디를 가려고 그러나?”

황제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극장 안에서 상당히 시간을 지체한 황제는 측근들을 데리고 황제 전용의 비밀 통로에 들어섰다. 대기하고 있던 케레아는 암호를 물었고, 황제가 암호를 대자마자 칼을 뽑아 30세의 황제를 찔렀다. 그러자 둘러서 있던 공모자들이 일제히 칼로 그를 찔렀다. 현장에 있던 병사로부터 황제가 살해당한 소식을 전해듣고 게르만 병사들이 무장한채 극장을 포위했다. 게르만 병사들은 지난날 카이우스의 부친 게르마니쿠스의 지휘를 따르던 부하들이어서 카이우스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던 것이다.

황제는 죽었으나 삽시간에 혁명의 주체가 바뀌었다. 급히 소집된 원로원 회의는 그를 시해한 케레아의 세력과 게르만 부대의 세력 사이에서 누구를 후계자로 세우느냐는 문제로 허둥대고 있었다. 게르만 병사들은 카이우스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추대하려고 했으나 사태에 겁을 먹은 그가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카이우스의 친구였던 유대 왕 아그립바 Ⅰ세가 황제의 유대 공격을 만류하려고 로마에 갔다가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속히 황제의 자리를 수락하도록 강력히 권고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 의원들을 황궁에 소집하도록 지시한 후 병사들을 거느리고 황궁에 나타났다.”(유대고대사 19-4)

그렇게 해서 후계자는 결정되었다.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측근들과 의논한 끝에 황제를 시해한 케레아는 훌륭한 일을 했으나 반역의 죄를 면할 수 없다며 처형을 명했다. 귀족들의 존경을 받던 코넬리우스 사비누스는 복권되어 군대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해서 폭군 칼리굴라의 시대는 끝나고 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에게 새 황제가 되도록 조언한 아그립바 Ⅰ세는 친구 카이우스가 죽었어도 여전히 그 자리를 유지했으며 그 아우 헤롯도 칼키스 땅을 하사받았다.

카이우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다시 이 기회에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고 헬라인의 상권을 눌러 놓기 위해 폭동을 일으켰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즉시 애굽 총독에게 명령을 내려 폭동을 진압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카이우스가 감옥에 가두었던 행정장관 알렉산더 리시마코스, 즉 대학자 필로의 아우를 석방하도록 조치했다. 또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의 권리와 특권을 보호하겠다는 칙령을 선포했다.

“나는 유대국이 카이우스의 광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와 특권을 상실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이 전부터 누려 오던 권리와 특권은 보호되어야 하며 그들 나름의 풍습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뜻이니라.”(유대고대사 19-5)

그리고 황위를 승계할 때 아그립바 Ⅰ세의 큰 도움을 받았던 그는 이 조치가 아그립바의 요청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내가 극진히 총애하는 아그립바 왕의 요청에 의해 로마 제국에 속한 모든 유대인들에게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과 같은 권리와 특권을 부여할 것을 선포하노라.”(유대고대사 19-5)

전 황제 카이우스는 유대에 대한 공격을 즉시 시행하지 않는다고 수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자살 명령을 내렸었다. 그러나 그 서신이 도착하기 전에 카이우스는 살해되었고, 페트로니우스 총독에 대한 자살명령은 무효가 되었다. 그는 황제의 자리가 클라우디우스에게 넘어간 후에도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그도 역시 새 황제의 방침에 따라 새로운 조치를 취했다.

“새 황제께서 유대인들에게 조상 전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하는 법령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회당의 종교적 모임을 규제하는 사례가 있는 바 이는 황제를 모욕하는 것이다. 또 황제상을 종교적 회집 장소에 세우는 것도 옳지 못하니 그런 일로 유대인을 괴롭히지 말라.”(유대고대사 19-6)

폭군 카이우스가 살해당하고 새 황제가 들어서면서 유대인들의 문제는 일단 해결이 된 셈이었다. 전 황제 카이우스의 친구였는데도 불구하고 새 황제의 신임과 총애를 받게 된 아그립바 Ⅰ세가 해야 할 일은 이제 오직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어 민심을 안정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열심히 잘 이행했다.

“아그립바 왕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모든 의무를 완전히 행한 후에 아나누스의 아들 테오필루스를 대제사장직에서 해임시키고 보에투스의 아들 시몬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유대고대사 19-6)

그러나 아그립바 Ⅰ세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유대인들 특히 산헤드린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하고 미워했으므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환심을 사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전도 사역은 여전히 활발했고,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도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소설 ‘마르코스 요안네스’에서 필자가 AD 40년 고국에 돌아온 것으로 설정한 마가는 이듬해 카이우스가 죽을 때까지 긴박한 상황 속에 상황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마가는 그 어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예수께서 처형당한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생생하게 전해 들었을 것이다.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이 그분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에 갔다가 빈 무덤을 보고 놀란 일이며, 막달라 마리아가 그분을 만난 것도 들었을 것이다. 또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역시 그분을 만났으며, 그분이 다시 마가의 집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사실과 디베랴의 바닷가에 나타나셨던 일에 대해서도 들려주고, 500여 명이 보는 데서 승천하신 일도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 후 오순절에 역시 그의 집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것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단번에 3000명, 5000명이 결신한 일에 대해서도 들었을 것이다. 또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일어선 일 등 수많은 기적이 일어난 것과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것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대학자 필로와 비견되는 젊은 학자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회심하여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였으며, 사도들을 만난 후에 고향 다소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다.

“카이우스 황제가 죽은 AD 41년부터 그가 안디옥으로 간 AD 46년까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성도들이 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었을까?”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부터 안면이 있는 예수의 제자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과 또 갈릴리 여인들을 비롯한 여러 성도들을 만났을 것이다. 그는 의미 깊은 장소가 된 다락방이 있는 집의 아들이어서 큰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그는 성도들의 집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기적들도 목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말론적 신앙에 몰입해 있던 그의 외삼촌 바나바는 조카인 마가에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왔으니 속히 그분이 부탁하신 전도 활동에 참여해 충성하라고 강권했을 것이다.



김성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