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안태정] 아이들의 은어

입력 2012-02-21 18:18


“쩔어” “헐∼” “댄장”. 지난 주말 가족 모임에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섞여 있는 조카들의 말을 관찰해 보니, 이 말을 가장 많이 쓰고 있었다. 비속어와 은어가 아이들의 일상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입만 떼면 욕설로 가득한 학생들에 비해 은어만 간간이 사용하는 수준이라 안도했으나 ‘외계어’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이해를 돕겠다며 나선 조카의 설명은 대충 이랬다. ‘쩔어’는 감탄하거나 핵심이 되는 단어 혹은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이는 말로, 좋게도 나쁘게도 사용되면서 무한대의 뜻을 지닌다. ‘헐∼’은 감정을 축약한 ‘헉’의 다른 말로, 강세와 길이에 따라 느낌이 다른데 보통 놀랍다는 뜻으로 쓰인다. ‘댄장’은 불만스러울 때 내뱉는 ‘젠장’을 대신하는 달콤 살벌한 은어!

어른들은 아이들의 은어를 거북하게 느낀 나머지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잦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화를 끊어 결국 접점을 찾지 못하는 가정도 많다. 다른 동물과 달리 공감능력이 뛰어난 인간이 정작 가족 간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아이들과 대화로 교감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올케의 방법이 궁금해졌다. “초기엔 은어를 못 쓰게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언젠가부터 뜻과 사용 시기를 물어보면서 아이를 이해하려고 했어요. 부모의 호응이 필요하죠. 배워서 같이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올케는 아이가 은어를 사용할 때 똑같이 사용하며, 친구를 대하는 방식으로 맞장구쳤다. 대화 중에 떠나지 않는 웃음은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내가 여기서 발견한 것이 거울기법이다. 상대방의 언어나 비언어적 메시지를 거울에 비추듯 따라하는 기법은 공감적 경청에 사용되는 심리학적 흉내 내기(mirroring)다. 타인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공감하며 유대감을 원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회나 가정 내 소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상대방이 몸을 기울이면 같이 기울이고, 팔짱을 끼면 똑같이 팔짱을 끼는 식이다.

세대 차이는 다른 세대들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해 소통을 외면하는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감이 형성되지 않으면 소통은 이뤄질 수 없고 서로 간의 이해는 더욱 멀어진다. 상대방의 의견을 들은 후, 반대하고 토론하고 다시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이해와 공감의 톱니바퀴가 맞물려가듯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생각 끝에 조카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헐∼” 하고 말해 보았다. 내 세대의 언어가 아니어서 그런지 혀에 달라붙지도 않고 어색했지만 대화 분위기는 한결 좋아졌다. 조카들이 “쩔어” 할 때도 따라했더니 아이들이 까르륵 웃는다. 이렇게 해서라도 조카들과 소통을 해야 하나? 이런 댄장!

안태정(문화역서울284 홍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