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아낌없이 주는 나무

입력 2012-02-20 20:03


실버스타인이라는 동화작가의 작품 중에 ‘The Giving Tree(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작품이 있다. 옛날 한 그루의 사과나무와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언제나 사과나무 그늘에 와서 놀았고, 이 나무는 소년을 너무도 사랑했다. 때에 맞춰 소년에게 예쁜 꽃을 주고, 잘 익은 사과를 선사했으며 소년이 자신의 기둥과 가지에 올라와 마음껏 노는 것을 늘 행복으로 생각하는 나무였다. 소년은 점차 자라면서 도시에 가고 싶었다. 나무는 소년과 헤어지긴 싫었지만 자신의 가지에 붙어 있던 모든 사과열매를 선물해서 소년의 꿈을 펼 수 있도록 도시에 가는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청년이 된 소년은 한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번엔 결혼해서 살집을 짓기 위해 나무의 가지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무는 소년의 행복을 기뻐하고 축복하며 자신의 몸을 모두 떼어 주었다. 이제 이 나무는 아름다운 꽃향기도, 잘 익은 사과열매도 맺을 수 없는 앙상한 기둥만 남은 나무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이 나무는 소년의 행복을 보며 흐뭇해했다.

세월이 지나고 장년이 된 소년이 찾아와 초조하게 말했다. 이제는 먼 나라에 가고 싶으니 보트를 만들 수 있도록 나무의 기둥을 요구했다. 나무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기둥을 베어서 보트를 만들도록 허락했다. 이제 아름답던 가지도 튼튼했던 기둥도 잃어버리고 초라하고 못생긴 ‘밑동’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도 이 나무는 사랑하는 소년의 삶이 행복하기만을 소원했다.

오랜 해가 지나고 이제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된 소년이 고향에 돌아와 나무 밑동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상처로 가득 찼고 눈에는 꿈과 희망대신 깊은 슬픔과 회한이 그득했다. 당당했던 어깨는 세월의 상흔에 짓눌려 기백을 찾을 길이 없었다. 나무는 사랑했던 소년의 아름답던 모습을 그리며 눈물지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아무 것도 줄 수 없지만 내 평평한 밑동에서 당신의 피곤한 몸과 영혼을 쉴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하겠다며 비바람에 단련된 자신의 밑동을 소년에게 내놓았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의 주제는 ‘사랑’이다.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이 나무의 희생적 사랑의 이야기는 비단 어린이를 위한 동화일 뿐아니라, 오늘을 사는 어른들에게도 삶의 신선함을 준다. 이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부모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이야기가 아닐까?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며 사랑하는 나무의 밑동까지 보고야마는 소년의 일생과 같은 삶이 아닐까?

복음서를 통해 보는 예수는 언제나 ‘비유’를 써서 하늘의 진리를 표현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다. 비유는 산문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시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는 것과 같다. 비유는 시의 언어요, 머리로 말해지는 언어가 아닌 가슴으로 말해 가슴으로 느껴지는 언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많은 비유 가운데 ‘자라나는 씨, 겨자씨의 비유’라 알려진 말씀이 있다. “천국은 겨자씨 한 알과 같은 것이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의 상징인 겨자씨! 눈에 가까이 놓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작은 겨자씨! 공중을 나는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겨자씨 한 알, 그 보잘 것 없는 ‘씨앗’ 하나가 심어지고, 자라면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가 되고, 그 가지 위에서 공중을 나는 새들조차 피곤한 날개를 쉬고가는 평화와 안식의 보금자리가 된다는 비유이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안에 심어진 십자가의 씨앗, 부활의 씨앗, 그 조그마한 겨자씨 같은 믿음의 씨앗을 소중하게 가꾸고 발아시키고 성장시켜 큰 나무가 되는 것,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감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 나무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나무를 말할 것이며 심지어 나무의 씨앗을 집어먹고 사는 공중의 원수! 저 새들마저 그곳에서 안식처를 찾는 ‘가지가 무성한 나무’, ‘숨을 곳이 참으로 많은 나무’가 돼야 한다는 말씀으로 믿고 싶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