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말복] 효명세자의 禮樂정치
입력 2012-02-20 18:21
“예악은 나라를 문화예술적으로 이끌면서 소통과 사회통합을 이끌어 낸다”
올해 국회의원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금으로부터 190년 전 조선의 국정지도자로서 수준 높은 예악정치를 펼친 효명세자(1809∼1830)를 생각한다. 그는 조선 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한창 기세를 올리기 시작할 때인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의 첫째아들로 태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순조의 염원과 기대를 한 몸에 지고 순조 27년 2월부터 대리청정(대청)을 했던 왕자였다. 3년 3개월에 그친 대리청정기간 동안 효명은 왕권회복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궁중연향과 춤을 통해 전달하는 무용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유가사상은 근본적으로 치국의 이념, 즉 나라를 다스리는 사상인데, 그 근본은 예악으로 교화를 행하는 데 있음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사람들의 몸과 마음, 사회를 문화와 예술로 이끈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궁중연향은 ‘예악에 의한 교화정치’의 일환으로 군신 간 대화의 장이자 사회통합 기능을 지닌 중요한 국가행사였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할 때는 궁중예악의 맥이 거의 끊긴 상태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종묘에서의 제사춤, 즉 일무의 명맥을 되살려 놓은 점이다. 효명은 종묘사직을 받드는 데 있어 제사와 연향에서 격식과 체통에 모자람이 없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예악정치의 이상을 표명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왕과 왕비의 탄신일, 설날이나 동지, 세자나 신하들이 임금에게 올리는 큰 규모의 연향인 풍정이 매년 열렸다. 그러다가 선조 대부터 흉년 등 경제적 이유로 점차 그 수가 줄어들고 규모도 축소되어 영조 대에는 국가적인 것에서 집안잔치 정도로 줄어들었다. 83세까지 장수한 영조의 52년 재위기간에도 풍정보다 적은 규모의 연향인 진연이 단 11차례 이루어졌을 뿐이며 효명의 할아버지인 정조의 24년 재임기간에도 진연 한 차례와 검소한 진찬 네 차례만 치렀을 뿐이다.
이에 비해 효명은 대청기간 동안 11차례의 크고 작은 황제식 연향들을 주최하며 이에 쓰이는 악장과 치사, 전문과 정재를 직접 창작하였다. 전통적으로 연향에 쓰이는 악장과 치사는 당대 문신들이 창작했으나 이것을 효명이 직접 창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향에서 시행될 궁중 춤을 정비, 확충하고 연향을 관장했다. 조선조 말까지 전해지는 정재의 수가 53종에 불과한데 그의 대청기간 동안 총 40종의 정재가 추어지고 그중 26종의 정재를 직접 예제하거나 재창작하여 궁중 춤의 진경시대를 열었다.
효명세자는 또 궁중의식과 춤을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인식해 안동김씨 세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왕의 세력을 키우는 장치로 활용했다. 대리청정 3년차에 접어들면서 그는 당시 권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비변사를 성공적으로 장악하고 안동김씨의 유력자들을 정계의 핵심에서 물러나게 하여 세도정치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독자적인 정치기반을 마련했다. 다만 효명은 젊은 혈기로 안동김문을 향한 칼날이 너무 예리했던 탓인지 요절하게 되고 사후 익종으로 추존되었다.
지금 남은 것은 효명세자의 정신이다. 예악 정치의 결과로 우리가 지니게 된 문화 예술적 유산은 오늘날 우리의 문화적 자긍심을 채워주고 있다. 사회가 점점 거칠어지고 계층 간 소통이 단절되어가고 있는 이즈음 우리 선조들의 사람과 사회를 문화적으로 예술적으로 이끄는 예악정치의 정신이야말로 소통과 사회통합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기억했으면 한다.
오늘날의 정치인들도 효명세자의 정신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백성을 위한 정치는 문화와 예술을 중시하는 예악에 의한 교화정치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는 이야기다. 올해 치러지는 선거에서 앞으로 4∼5년간 우리나라의 국정을 짊어질 훌륭한 지도자가 나오길 바라면서 이들이 수준 높은 예악정치를 펼쳐 우리나라를 멋진 문화예술국가로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
김말복 이화여대 교수 무용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