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갤리선의 노예에서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로 존 녹스 (中)
입력 2012-02-20 18:35
섭정 기즈 메리 죽자 종교개혁 박차…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 조직
“오 하나님,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로 귀국할 때 했던 기도이다. 그는 이 기도대로 목숨을 걸고 스코틀랜드를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해서 스코틀랜드로 귀국하게 된 것일까?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탄압하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여왕들을 ‘괴물’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하던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있을까?
또 다시 영국의 정치적 상황이 급변했다. 영국 여왕 ‘피의 메리’가 죽은 것이다. 로마 교황청과 스코틀랜드 조정은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헨리 7세의 종손임을 들어 영국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핍박을 받았던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등극했다. 엘리자베스는 종교개혁자들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을 펼쳤고, 영국 국교회를 복원시키고자 했다. 스코틀랜드 당국도 종교개혁자들을 처단해 영국의 심사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섭정 기즈 메리가 잃은 민심을 얻기 위해 종교적 관용을 선포할 필요가 있었다.
존 녹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녹스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여 귀국을 요청했다. 녹스는 1559년 1월에 제네바를 떠났지만, 영국에서 통행권을 내주지 않아 5월이 돼서야 겨우 귀국하였다.
그가 만든 팸플릿 ‘괴물 같은 여성 통치에 대한 첫 번째 나팔소리’ 때문이었다. 여왕의 통치가 성서에 어긋나며, 괴물 같은 것이라고 지칭한 그 팸플릿을 영국 왕실은 공식적으로 정죄하였다. 그가 이 팸플릿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직접 공격하지 않았지만, 여왕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에게 통행권을 내주지 않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지만, 스코틀랜드 왕실은 여전히 종교개혁자들을 감시하고 박해했다. 설교나 성례는 주교의 동행 하에만 허용되었다. 이에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이 설교 운동을 전개하자, 섭정은 그들을 소환하여 반역죄로 정죄하고 파문했다. 종교개혁자들을 박해하는 것에 성난 군중은 3개의 수도원과 교회당을 불태우고 스쿤에 있던 왕궁을 불태워 버렸다.
이에 놀란 기즈 메리는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여왕 메리의 남편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가 그녀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도 배와 군대를 보내 종교개혁자들을 지원했다. 기즈 메리와 종교개혁자들 사이에 일대 내전이 벌어졌다. 영국의 지원을 받는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 리스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560년 섭정 기즈 메리가 사망하면서 전쟁도 종결되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에든버러 협정을 맺고, 둘 다 모두 스코틀랜드에서 퇴각하였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자들의 수중에 들어왔다. 존 녹스는 왕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를 소집하여 종교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의회는 가톨릭의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프랑스와의 외교단절을 선언하였다. 교황의 관할권을 폐기하고 미사를 금했으며 세 번 이상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교육 개혁과 빈민 구제도 결의했다. 이러한 것들을 뒷받침할 권징서와 신앙고백서를 마련하기 위한 신조작성위원회도 구성하였다. 녹스를 비록해 존 윌록, 존 스포티스우드, 존 더글러스와 존 로우 등 6명의 존이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신조작성위원회는 4일 만에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신조 작성의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배척하고 성경에 근거한 것은 무엇이든지 채택한다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는 25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녹스는 1561년 12월에 최초로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조직하였다. 총회는 제일권징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를 채택했다. 이 권징서는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의 지침서로, 장로교회의 형태부터 교인들의 교육에 대한 내용까지 담겨 있다. 교회 직분은 목사, 장로, 집사로 나누고 장로와 집사는 1년에 한 번씩 선거를 통해 임직되도록 했다. 목사는 목사와 장로회의 공개심사를 거친 후 회중의 선거에 의해 선발되도록 했다. 그리고 감독직을 두어 교회를 관리 감독하도록 했다. 또한 모든 마을의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각 교구마다 고등교육기관을 세워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도록 권장하였다. 교회 재산은 목사의 생활비, 빈민구제와 교육을 위해 사용하도록 정했다.
이렇게 박차를 가하던 종교개혁은 1561년에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귀국하면서 다시 제동이 걸리게 된다. 메리 스튜어트는 귀국하자마자 가톨릭 미사를 드려 법으로 미사를 금지시켰던 의회와 충돌했다. 그런 여왕에 대해 존 녹스는 설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한 번의 미사가 1만명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보다 더 두렵다.”
여왕은 존 녹스를 소환하여 법의 제정권과 집행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녹스는 입법권은 백성을 대표하는 의회에 있으며, 왕이라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항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여왕은 녹스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종교개혁을 무력화하고 교황 정치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설교를 통해 존 녹스는 여왕이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여왕은 계속해서 교황 피우스 4세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스코틀랜드를 가톨릭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획책했다. 여왕은 1563년에 ‘무적함대’를 보유한 강력한 국가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의 아들 환 칼로스와 결혼하고자 했다. 이 결혼이 의미하는 것은 스코틀랜드가 스페인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것이며, 다시 가톨릭 국가로 환원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펠리페 2세는 로마 가톨릭의 맹주를 자처하며 로마 가톨릭에 의한 국가 통합을 이상으로 추구하였다. 또한 본인도 신심 깊은 가톨릭교도였다고 전해진다. 물론 녹스는 이 결혼을 극력 반대하였다. 여왕 메리는 왕궁으로 녹스를 소환했다. 그녀는 처음에 녹스를 꾸짖다가 와락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내 결혼을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 그리고 이 나라에서 당신은 도대체 뭡니까?”
녹스가 여왕에게 대답했다. “이 나라에서 저는 일개 신민으로 태어났습니다. 여왕 폐하, 저는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다른 신민들과 마찬가지로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것을 경고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왕은 울음을 그치고 그에게 방에서 나가라고 명령했다. 환 칼로스와 결혼하려던 여왕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녀는 대신 가톨릭교도로 자처하는 그녀의 사촌 헨리 스튜어트, 즉 단리 경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단리 경은 메리가 그녀의 외교 비서인 데이비드 리치오에 대해 호감을 가진 것을 알고, 질투심에 불타서 리치오를 청부살해하였다. 메리 여왕은 남편의 살해 행위에 보복하는 마음으로 리치오와의 밀애에서 가진 아이 제임스 6세를 낳았다.
메리는 이후 또 다른 남자 개신교도인 보즈웰 백작과 사랑에 빠졌다. 보즈웰과 단리 경은 메리를 차지하기 위해 반목을 계속하던 중 단리가 천연두를 앓고 요양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단리는 1567년 2월 메리에 의해 휴양차 시골집으로 옮겨졌다가 집이 폭파돼 살해당했다. 사람들은 연적 보즈웰을 의심해 그를 투옥시켰으나 여왕 메리는 그의 무죄를 선언하고 석방하였다.
그 후 보즈웰이 아내와 이혼하자 메리는 그와 개신교 식으로 결혼했다, 시민들과 귀족들은 그녀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몰염치한 행동에 분노를 나타냈다. 종교개혁자들뿐만 아니라 영국과 대륙의 가톨릭교도들도 등을 돌렸다. 그녀는 폐위되었고 13개월밖에 안 된 그녀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녀의 폐위로 종교개혁은 다시 추진되었고 존 녹스는 제임스 6세의 대관식에서 설교하였다.
그 사이 폐위된 메리는 로크 레븐 성에서 탈출해 영국으로 피신, 영국에서도 가톨릭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녀는 가톨릭 인사들과 함께 엘리자베스의 살해를 음모했다는 죄로 정죄되어 런던타워에서 처형당했다. 만약 그녀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라는 존 녹스의 말을 들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비참한 최후는 피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