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가 그녀 ‘도전의 26년’을 엿보다… ‘비너스 작가’ 재미교포 데비한의 ‘비잉(BEING)’展

입력 2012-02-19 17:52


미국에서 태어나 공부한 데비한(43) 작가는 비너스를 모티브로 한 조각 및 사진 작품을 들고 2003년 한국 미술계에 샛별처럼 나타났다. 감각적인 그의 작품 못지않게 눈길을 끈 것은 머리카락을 쭈뼛 세운 헤어스타일과 꿈꾸는 소녀 같은 이미지였다. 그의 모습을 닮은 비너스 시리즈는 국내외 전시 등에서 호평받았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비잉(BEING):데비한 1985∼2011’ 전이 열리는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최근 만난 그는 외모는 10년 전 그대로이지만 작품은 변화무쌍했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작품세계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중간 회고전 성격인 이번 전시에서 그는 ‘비너스 작가’라는 선입견을 깨기에 충분할 만큼 회화 조각 도예 사진 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다.

전시는 어린 시절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살았던 작가의 이민 초기부터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시절을 거쳐 한국에서 작업하며 보냈던 지난 7년간 등 시기별로 3개 섹션으로 구성됐다. 3층 전시장에서는 16세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그림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흔적을 회화와 드로잉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시기별로 기법과 재료, 분위기가 너무 달라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쳤던 작가의 심리 변화를 짐작케 한다. 그는 삶에 대한 절망에 깊이 빠져있던 1990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겹쳐 작품에 색상을 도저히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의식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화려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만약 그때 작업을 통해 절망감을 분출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라는 그는 92년 명상을 통해 정신적 탈출구를 찾았다. 작업에도 다시 빛과 색이 돌아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내면에 집중한 탓에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던 자신을 발견한 그는 98년부터 다시 시선을 세상으로 돌리고 타인과의 소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서구적 아름다움의 상징인 비너스의 머리에 평범한 한국 여성의 몸을 합성한 작품은 그런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거쳐 나온 결과물이다. 작가는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따라 소재도 작업도 늘 달라진다”며 “나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시각예술가(visual artist)”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지난 26년간 작업을 보여주는 회화 드로잉 조각 설치 도예 작품 60여점을 출품했다. 2003년 국내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후 7년가량 한국에서 작업하면서 미술대학의 입시 제도를 꼬집은 ‘지우개 드로잉’ 연작도 선보인다. 미술학원에서 획일적으로 그림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지우개 똥을 모아 화면에 붙인 그림이다.

얼굴이 뭉그러지거나 입이 지나치게 큰 청동 비너스를 부식시켜 용도폐기된 것처럼 만든 작품과 백자 파편을 유리박스에 진열한 작품이 이색적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예술은 무엇인가. 삶은 또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그는 “의식이나 삶에 변화가 찾아오면 이에 맞춰 새로운 언어로 작업한다”며 “나에게 작업은 그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것”이라며 웃었다. 3월 18일까지 전시(02-737-765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