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썩어가는 휴머니즘 맛보실까요?… 김사과 장편소설 ‘테러의 시’
입력 2012-02-17 18:34
소설가 김사과(28·사진)의 장편소설 ‘테러의 시’(민음사)는 조선족 여성 제니가 아버지에 의해 팔려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냄새가 난다. 그것 또한 모래 냄새가 아니다. ( )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향해 다가간다. 창문 반대편에서 한 손이 나타난다. ( )가 뒤로 물러선다. 창이 열린다. 잠든 동물이 깨어나고 벌레가 파이프 속으로 도망친다. ( )가 한 손에 모래를 움켜쥔다.”(13쪽)
노란 모래로 덮인 도시에서 제니의 아버지는 제니를 우리에 갇힌 돼지처럼 키운다. 갇힌 제니는 소설 도입부에서 ( )로 표기된다. 서울에 팔려온 후에도 제니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서울 외곽의 불법 섹스 클럽에서 제니는 여러 나라에서 팔려온 여자들과 함께 몸을 판다.
어느 날 클럽에서 만난 중년의 이혼한 고위공무원이 제니를 가정부로 들인다. 제니는 그의 집에서 그와 세 아이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가끔 그가 예약한 호텔로 불러나가 섹스를 하는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제니는 막내아들의 영어 과외 교사였던 영국인 리와 사랑에 빠져 집을 나간다. 리가 사는 곳은 철거 예정인 빈민촌 ‘페스카마 15호’.
그곳에서 환각에 빠져 지내던 제니는 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 책을 펼치니 커다랗게 ‘휴머니즘’이라고 쓰여 있다.
“천장도, 바닥도, 싱크대도, 프라이팬도, 프라이팬 속에서 썩어 가고 있는 스파게티 또한 휴머니즘으로 충만하다. 제니가 썩은 스파게티를 한입 가득 넣고 씹는다. 이것이 바로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의 맛. 휴머니즘 그 자체. 휴머니즘의 핵심. 그것은 몹시 역겹다. 쓰다. 썩은 냄새가 난다. 정말이지 구역질이 난다.”(110쪽)
김사과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겉만 번지르르한 채 속은 썩을 대로 썩은 서울의 구역질나는 휴머니즘에 있을 것이다.
2005년 단편 ‘영이’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우리 사회의 병폐와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김사과는 이 소설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의 폭력성에 대해 더욱 시퍼런 적의를 드러낸다.
살짝 맛이 간 세상, 거친 세상일수록 그것을 진술하는 작가의 언어도 거칠어진다. 제니가 바로 지금의 서울에서 내지르는 비명을 김사과는 상상 속에서 채록해 직설화법으로 들려준다. 소설에 등장하는 누구로부터도 희망이나 미래를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가혹 그 자체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