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에서 큰 울림을 꺼내다”… 이상국 시인 ‘뿔을 적시며’
입력 2012-02-17 18:33
사람이 말로 삶을 위로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말은 말일 뿐이어서 팍팍하고 거친 삶의 내부까지 들여다보며 맥을 짚기는 정녕 어려운 일이다. 이상한 것은 범인(凡人)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위로와 위무의 말을 이상국(66) 시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부려놓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해 봄 그것도 단 한번/ 신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한 다음부터/ 나는 갑자기 늙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햇살 좋던 봄날 아침의/ 아무것도 아닌 실수였는데/ 그 일로 식구들은 나의 어딘가에서/ 나사가 하나 빠져나갔다고 보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장에 나가는 염소처럼 뻗디디며/ 한동안 혼자 뿔질을 해대던 나는// 어느 날 마당에 나뭇짐을 벗어놓듯/ 먼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그 속으로 들어갔다”(‘먼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전문)
아마도 아내와 사소한 일로 다툰 뒤 집을 뛰쳐나온 아침이었을 것이다. 신을 짝짝이로 신고 뛰쳐나온 그는 말이 외출이지 실은 가출을 결심했을 터. 몇 날을 밖에서 지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속으로 삭혀야 했던 것은 화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살다 살다 어찌 여기까지 왔나, 하는 인간적인 고민과 존재론적 상념이 왜 겹치지 않았겠는가. ‘먼데 어머니 심부름 갔다 오듯’이라는 시구는 바깥과 안을 동시에 관통하는 진술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네 번째 시집 ‘뿔을 적시며’(창비)에 수록된 시편들은 이렇듯 사소한 일상에서 출발해 인생의 묘약 같은 감동을 다발로 안겨주는 시인의 크나큰 품을 보여준다. “면에서 심은 코스모스 길로/ 꽁지머리 젊은 여자들이 달리기를 한다/ 그들이 지나가면 그리운 냄새가 난다/ 마가목 붉은 열매들이 따라가 보지만/ 올해도 세월은 그들을 넘어간다/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여름이 또 가고 나니까/ 민박집 간판처럼 허술하게/ 떠내려가다 걸린 나뭇등걸처럼/우두커니 그냥 있었다”(‘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부분)
시인의 고향은 속초와 인접한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강선리이다.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서 성장한 그는 근래 10여 년 동안 만해마을 운영위원장을 맡아 미시령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왕래했다. 이제는 그것도 그만두었지만 동해와 설악 사이로 불어가는 바람을 맞으며 그는 나이를 먹었다. 그 나이는 넓고도 높다. 그래서 이런 시가 얻어지는 것이다.
“영하의 날씨가 계속된다// 엄동이다// 길가의 나무들이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손을 흔들다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저만큼씩 따라간다// 냇물도 애들처럼 시퍼렇게 얼었다// 히터가 제 몸에 달린 온도계 눈금을 끌어올리려고// 애는 쓰는 데 안되니까// 버스매표소 구석에서 그냥 울고 있다”(‘용량(容量)’ 전문)
바람이 그를 깎아서 더 사람 같은 사람을 만든 것일까. 안과 밖, 외압과 내압의 절묘한 균형이 시의 깊이를 더해준다. “비오는 날// 안경쟁이 아들과 함께// 아내가 부쳐주는 장떡을 먹으며 집을 지킨다// 아버지는 나를 멀리 보냈는데// 갈 데 못 갈 데 더듬고 다니다가// 비 오는 날// 나무 이파리만한 세상에서// 달팽이처럼 뿔을 적신다”(‘뿔을 적시며’ 전문)
올곧게 리얼리티에 기댄 삶의 궁극. 이런 시만 있다면 시는 몰락하지 않을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