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성 유산에는 정확한 분석이 필요한데 당신의 할머니처럼 다산성의 별보배조개 체질도 아니고 당신 어머니 같이 들큰한 애액을 분비하고 까무라치는 가무락조개 성질도 닮지 못했으니 갑골문형에서 심각한 유전자 변형을 일으킨 것은 매일 고통의 각성제인 모래를 치사량 이상 삼키거나 일부러 깊숙하게 상처를 내나본데 나의 소견으론 내부의 백색알갱이를 포기하고 몸을 내게 맡기는 건 어때 어차피 패물이 퇴물로 될 때까지 화폐로 유통되긴 마찬가진데 반짝이는 암세포를 제거하면 눈깔만한 양식 진주 목걸이를 당신에게 걸어주지 몰락한 부족에게 그게 어디야”(‘조개껍데기 가면을 쓴 주치의 답변’ 전문)
이것은 시인가. 무엇에 대한 시인가. 김이듬(43·사진) 시인이 2001년 계간 ‘포에지’ 가을호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겉보기에 낙태나 유산에 관한 독백으로 읽혀질 수 있는 이 시는 우리가 시를 어떻게 쓰고 어떻게 낳을지에 관한 질문을 내포함으로써 문학의 새로운 영토에 편입됐다.
‘습관성 유산’이라는 말에서 시 쓰기에 자주 실패한 등단 이전의 시인을 짓누르던 강박이 읽혀지지 않은가. 그건 반복적으로 사산되고만 시적 실패의 흔적들이다. 그래서 시인은 ‘습관성 유산’을 반복하는 한이 있더라도 양식 진주목걸이, 즉 모조품을 생산하지는 않겠다는 모종의 시적 결단을 내리고 있다.
감각의 총화인 몸을 통한 감성실험
내면과 현실세계 사이 균열 엿보다
시적 화자는 선대가 누렸던 건강하고 튼튼한 생식기관이 자신에게 없다고 주치의에게 푸념하듯 털어놓고 있지만 실상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가 모래를 삼키거나 제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몸에 특별한 감각기관, 다시 말해 시적 감수성의 자리를 만들기 위함이다. 주치의는 그녀에게 ‘백색 알갱이’로 상징되는 천연 진주의 핵을 포기하는 대신 세속적 가치로 통용되는 모조품이나 생산하라고 은근히 권하고 있다.
의외의 반전은 주치의가 말한 ‘몰락한 부족에게 그게 어디야’라는 마지막 한 마디에 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을 몰락한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 부족을 몰락으로부터 구원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전적으로 시적 성감대가 돼야겠다고 결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화술은 여성의 몸 자체를 거론하면서도 섹시한 은유와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경쾌감을 준다. 감정이입이라는 여성적 원리가 시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김이듬의 감성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이다. 그가 가장 정직하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지식도 지성도 아닌, 감각의 총화로서 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이듬은 “육체의 감각 밑에서 시를 발굴한다”는 평을 듣는다. 이렇듯 ‘금지된 것’에 대해 용감하게 입을 열면서 등장한 여전사로서의 김이듬은 최근 시편들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숲으로 엠티 왔네 이름도 거시기한 반성수목원으로 같은 길을 가는 동료들과 함께// (중략) 흠뻑 변을 비비는 아버지를 두고 왔네 혼자서 칠갑하고 있겠지// 먹던 도시락을 건네네 방울토마토 굴러가네 마시려던 맥주병도 던져주었지 내 곁에 쭈그려 앉은 그가 추잡한 옷차림의 그가 여기저기 버려둔 떡이며 찌꺼기 같은 걸 갈퀴 같은 손으로 끌어와 입으로 주머니로 쑤셔 넣는 그가 게걸스럽고 무례하고 추레한 또 뭐라고 할까 그래 인간도 아니다 수치심을 이긴 죽음을 극복하는 허기 불멸하는 궁기 그리하여 인간을 넘어서는// 신이다 신이 오셨다”(‘너라는 미신’ 부분)
시인의 강박 속에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엠티 현장까지 따라와 서성인다. 게걸스럽게 음식물을 탐하는 아버지. 해결할 길 없는 가족 관계의 불합리성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나 종결될 것이다. ‘인간을 넘어서는 신이 오셨다’는 구절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절박함을 한 번 더 비틀어 들려주는 강박의 발화이기도 하다. 다만 이 상황 자체는 하나의 환각이다. 상황의 실재성을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다. 문제는 상상적 모험에서의 시적 주체의 위치와 궤적이다. 분열증 너머의 시적 에너지는 그런 주체의 중얼거림, 내지 발화에서 탄생한다. 이미 꿈에 취한 자, 혹은 몽유를 앓는 자, 가사(假死) 상태로서의 자아는 자신의 강박증을 상징질서를 위반하는 에너지로 동력화해 분열된 발화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강박을 이처럼 경쾌하게 그리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 아이러니가 시의 긴장감을 배가한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정철훈의 현대시 산책 감각의 연금술] ② ‘금지’를 거부하는 여전사… 시인 김이듬
입력 2012-02-17 20:02